전차와 한성전기, 그리고 한국전력Ⅰ
전차, 한성전기의
시작과 함께하다
우리나라 전기의 역사는 1887년 경복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청궁에 밝혀진 첫 번째 전등부터 시작된다. 건청궁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던 곳으로,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열망 속에서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상용화한 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며 동양 최초로 에디슨 전등회사의 발전 시스템이 설치된 것이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이 탄생하고 자주적으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를 통해 1898년 1월 26일 광무황제(고종)의 황실자본 출자에 의해 우리 한국전력의 전신인 최초의 전력회사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음은 현재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성전기가 시작한 첫 번째 전력사업은 무엇일까? 사실 이 부분은 우리 한전 구성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못한 측면으로,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전등’이 아니라 노면을 달리는 교통수단인 ‘전차’였다. 한성전기는 전차, 전등, 전화 설비 사업을 위한 운영권을 농상공부에 신청하여 설립된 회사로, 한성전기 초대사장인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이채연은 먼저 서울 시내 전차부설에 착수했다. 1898년 9월 경희궁 앞에서 기공예식을 거행해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의 전차 노선 공사를 착수하였고, 동대문 바로 안쪽에 동대문발전소와 차량기지(지금의 jw 메리어트 호텔 일대) 등을 건설하고 1899년 5월 4일에는 고관과 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을 개최했다. 개통식은 동대문 일대가 수많은 인파로 뒤덮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후 5월 20일 일반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착수했고, 8월에는 청량리선의 연장 개통, 12월 용산선의 영업 시작, 1900년 7월에는 의주선, 1906년 마포선이 개통되었다.
- 전차, 근대화의 시작과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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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차 사업 의미는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을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다. 먼저 광무황제(고종)의 산업진흥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광무황제는 1880년대부터 전력산업에 지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져 왔고 편리한 교통수단을 갖기를 희망했다. 전력산업 개발, 특히 전차 포설이 산업진흥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은 용산선의 부설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후기 각종 관영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던 용산은 한강변 최대의 민간 상업지 마포와 더불어 당시 인구가 크게 늘어난 곳의 하나였다. 경인철도가 영등포까지 개통되고 영등포-용산 간은 별도로 경편레일이 부설되어 용산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이에 용산선 전차의 준공을 통해 인천에서 도성 안까지 운송체제를 만들어 용산을 공업지대로 육성하며 도성과 긴밀하게 연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전차는 수도 한성을 황도(皇都)로 개편하기 위한 도시개조 사업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점하고 있다. 전차의 본선, 용산선, 의주선은 경운궁 주변을 둘러싼 형세를 취해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 형성에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대중교통인 전차는 누구나 탈 수 있는 수단으로, 요금을 지불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 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정해진 노선과 계획된 시간 속에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배우며 근대 도시인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도성 밖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늦은 밤까지 전차를 탈 수 있음을 통해 이전의 시대와 확연히 다른 시대로 진입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차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도 각별했을 것이다. 전차는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전차 선로는 크게 확장된 도로와 함께 한성을 제국의 수도로 여기게 하는 수단이었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만행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까지 전차가 달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반일 의식을 형성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기제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 『서울의 전차』 , 서울역사박물관, 2019)
- 전차, 서울의 풍경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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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성문을 통과하면서 문을 여닫지 못하게 되자, 도성(屠城)의 심리적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도 그 경계는 허물어졌고, 잇따른 궤도의 부설로 인해 성문과 성벽이 철거되었다. 왕조의 상징인 궁궐도 변형시키는데,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를 위한 궤도로 인해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없어지고,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은 전차가 발생시키는 진동으로 붕궤되었다.
또한 전차는 강제병합 이후 경성의 윤곽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차 노선의 신설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남촌을 중심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군대가 주둔했던 신용산 일대를 도심과 연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191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일본인 상업지구로 떠올랐던 본정(종로4정목에서 현재 충무로인 본정에는 경성 내 일본인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다), 황금정(숭례문에서 광희문까지의 노선, 일본인들은 주로 황금정에 거주했다)까지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전차 노선이 북쪽으로 확대된 것은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과 조선박람회 때문이었다. 남산에 있던 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주변에 관사와 사택들이 들어섰고, ‘북촌 노선’은 조선총독부에 출퇴근하는 일본인들과 관사 및 사택 거주자들을 위한 노선이었다. 박람회 또한 경복궁에서 열렸다.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서는 대규모 관람객이 필요했고, 그의 수송에는 전차가 필수적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궁궐은 무참히 변형되어 버렸다.
1936년 경성의 행정구역이 4배로 확장되자 정책방향의 중심은 교외 개발이 되었고, 전차 노선 역시 이에 따라 계획되었다. 교외로의 노선 부설은 사람들의 여가 증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전차는 뚝섬까지도 달렸는데, 승객과 물자 수송 뿐 아니라 경성의 오물 처리 역할도 했다. 이처럼 전차는 당시 도시 생태계가 움직이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다음호에 계속 -
북촌과 남촌의 전차노선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