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불러낸 단종의 시간
    새드엔딩이 자명한 영화를 보는 일은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슬픔의 강도가 유난했던 건 어쩌면 그래서였겠다. 요즘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불러낸, 아니 읽어낸 영월의 1457년이 ‘핫’하다. 그만큼 말하는 이도 많고 찾는 이도 많다. 그중 대다수가 꼽는 영월 여행의 목적은 ‘단종이 마주했을 풍경’이 궁금해서다. 영화 속 장면이 겹쳐 보이는 자리에 서서, 그가 느꼈을 슬픔의 깊이를 헤아려보고 싶었다는 것. 과연 어땠을까. “생각보다 훨씬 더 고립된 느낌이라 더 슬펐다”라는 이가 수두룩했다. 영월에 닿자마자 청령포부터 찾아야겠다 마음먹은 건 이 때문이다. 스크린이 깨운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는 말하자면 땅과 강의 형세로 사람을 가두는 자리다. 삼면을 서강의 둥그런 물길이 막아서고 남은 한 면마저 험한 산자락이 닫아걸어 그리움마저 향할 곳을 잃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영화에서는 청령포의 이런 지리적 환경을 ‘오소리도 길을 잃고 너구리도 환장해 졸도하는 곳’으로 그려낸다. 그만큼 아득한 경계란 얘기다. 청령포에서 단종의 이토록 아득했을 마음을 확인하기 좋은 자리는 세 지점이다. 물길 맞은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청령포 전망대와 노산대, 망향탑이다.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해지는 노산대와 아내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은 청령포에서 걸어 닿을 수 있는 길의 끝점들이다. 막다른 길의 끝에서는 누구의 마음이든 쉬이 꺾이는 법. 이 끝으로 가도 저 끝으로 가도 길이 없는 곳에서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은 그래서 더 막막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곳을 절망의 공간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감시자(엄흥도)와 피감시자(단종)로 출발한 두 주인공의 관계가 이곳에서 연민과 동요로 바뀌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는 단종의 다짐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래서일까. 울창한 솔숲 가운데쯤에 자리한 단종어소에 서면 길의 끝점들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조금은 가신다. 사람의 온기가 풍경을 데운 것처럼 묘하게 따뜻해진다. 영화가 읽어낸 역사의 행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 그루 소나무의 영향도 크다.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를 닮아 ‘엄흥도 소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오래전부터 어소를 향해 절하듯 가로 누워 있다. 그 애잔한 풍경 위에 영화 속의 장면을 겹쳐보는 일이라 밀려드는 감정도 참 겹겹이다.

    청령포가 살아있는 단종의 슬픔을 가늠해보는 자리라면, 장릉은 박제된 그의 슬픔을 역사로 대면하는 곳이다. 죽음마저 온전하지 못해 강물에 던져졌던 시신이 엄흥도의 충심으로 거두어져 남몰래 매장된 곳. 묘는 그 상태로 200년 넘게 방치되다, 숙종 때 단종 복위가 이뤄지며 비로소 ‘장릉’이라는 능호를 얻었다. 화려한 석물 대신 키 큰 소나무들이 둘레를 지키는 곳. 그곳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함께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도 있다. 매년 4월 열리는 단종문화제가 이들의 오래된 슬픔을 오늘의 이야기로 불러낸다.

    단종은 영월에 1년을 채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단종 없는 영월은 있을 수 없다. 올봄엔 영화가 채운 역사의 행간에 역사가 남긴 한 줄의 문장까지 더해 단종을 만나러 가보는 건 어떨까. 단종 유배의 흔적이 서린 선돌부터 청령포까지, 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머문 관풍헌에서 장릉까지. 그의 서사 그대로를 따라 움직인다면, 영월 안에 차곡차곡 접혀 있는 단종의 시간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질 테다.
  • 물비늘 화사한 봄날의 강가에서
    영화 속에서 물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이다. 그 옛날, 서강처럼 영월의 동쪽을 타고 흐르는 동강에도 슬픔은 배어들었다. 추측건대 단종 승하 직후였을 것이다. 그를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몸을 던진 곳이 낙화암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들이 꽃처럼 산화했다는 이곳을 봄에 찾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꽃이 펴서다.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민충사 주변 금강공원 일대가 알아주는 벚꽃 명소이기 때문. 덕분에 봄마다 이곳은 영월 어디보다 환한 꽃밭이 된다. 벚꽃 핀 금강정 마루에 앉아 동강 푸른 물빛을 눈에 담아도 좋고, 물길 맞은편 전망대를 찾아 연둣빛 흐르는 물가 풍경을 바라봐도 좋다. 그러다 한 번씩 물오리들이 뽀그르르 자맥질하는 풍경을 마주하면 그렇게 마음이 푹 놓일 수가 없다. 비극의 자리에 다시 생명이 움트고 꽃이 피는 일은 그래서 더 애달프고 찬란하다.
    단종의 뒤를 따라 동강에 몸을 던진 여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민충사.
    천연기념물인 요선암 돌개구멍. 주천강 물길이 오랜 세월 흰 바위를 숟가락으로 떠낸 듯 기묘하게 깎아놓았다.
  • 물과 달과 별의 노래가 들리는 봄
    봄이니 물비늘 화사한 봄날의 강가도 더 거닐어보자. 영월은 물길이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땅 곳곳에 기묘한 풍경을 여럿 빚어놓은 도시다. 서강이 오랜 세월 조각한 한반도 지형(선암마을)부터 주천강 거친 물살이 남겨놓은 돌개구멍까지. 여기에 주천강 물로 술 빚던 옛 술도가의 시간 위로 강렬한 현대 예술을 덧입힌 젊은달와이파크까지 있으니, 감탄할 일이 한층 많다.

    별마로천문대는 영월의 이 많은 물길, 그중에서도 서강과 동강과 남한강이 만나고 헤어지는 형상을 바라보기 좋은 자리다. 혹시 ‘단종의 별’ 을 아시는가. 사자자리 가운데 가장 밝은 별인 ‘레굴루스’가 바로 단종의 별(영월군 명명)이다. 별마로천문대에 서면 낮에는 낙화암 앞을 흐르는 동강과 청령포를 휘감아 도는 서강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밤에는 단종의 별을 찾아 그 아득한 빛과 마주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그림자였을 단종 이홍위. 영화가 불러낸 그처럼, 이 별도 겹겹의 시간을 지나 우리 앞에 당도한 그의 꿈은 아닐지. 아니, 부디 그러하길.

TRAVEL TIP

  • 청령포
    • 운영시간 09:00~18:00(연중무휴)
    • 입장료 성인 3,000원(도선료 포함)
    • 문의 033 372 1240
  • 장릉과 단종문화제
    • 운영시간 09:00~18:00(연중무휴)
    • 단종문화제 4.24.~4. 26.
    • 입장료 성인 2,000원
    • 문의 033 374 4215
  • 젊은달와이파크
    • 운영시간 09:00~18:00(연중무휴)
    • 입장료 성인 15,000원
    • 문의 033 372 9411
  • 별마로천문대
    • 운영시간 15:00~23:00(매주 월 휴관)
    • * 천문대 이용 시, 사전 예약 필수
    • 입장료 성인 7,000원
    • 문의 033 372 8445
영월에 살아보니 영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병주 영월지사 배전운영팀 대리

영월에 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423일이 지났다. 입사 후 춘천과 인제를 거치며 8년을 근무한 뒤, 지난해부터 영월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영월에서의 삶은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용한 애정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어엿한 영월군민으로서 몇 가지 팁을 전하고자 한다. 서울에서 오는 여행자들에게는 가능하다면 낮 시간대 이동을 추천하고 싶다. 서울에서 영월로 이동할 때 보통 제천을 지나게 되는데 그 구간에 가로등이 많지 않기도 하고, 산과 강이 어우러진 영월의 아름다운 풍경은 햇빛 아래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는 것도 좋다. 영월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와 ITX 열차,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도 수시로 운행되어 교통수단의 선택지도 다양하다.

특히 ITX-마음 열차는 약 1시간 48분 만에 서울에 도착해 생각보다 접근성이 나쁘지 않은데, 그에 비해 영월이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종종 놀라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며 영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구내식당이 없는 우리 지사의 직원들은 점심시간이면 인근 식당을 찾는데(나름대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관광객들로 식당이 붐벼 발길을 돌려야 하는 날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롯데리아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했던 게 아쉽기도 했지만 이처럼 관광객이 늘어 조금씩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보면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번 계기를 통해 우리 역사와 국내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방 도시에도 활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청령포, 선암마을 한반도지형, 동강 래프팅 외에도 영월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차고 넘친다. 매년 4월 영월에서는 단종문화제가 열리고, 별마로천문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또 젊은달와이파크(젊은달이 무슨 뜻일지 상상해 보시라)에서 멋진 작품들을 관람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지금은 ‘인구감소지역’, ‘지방소멸 고위험지역’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마치 영월군의 슬로건인 ‘Young World’처럼 영월의 다채로운 매력은 젊고 생생하다. 조선의 비극적인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하는 도시, 영월. 기회가 된다면 사우 여러분도 한 번쯤 이곳을 찾아 ‘영월드’의 매력을 직접 느껴보시길 바란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