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력사
무제한 송전시대 열다!
1964년 4월 1일은 전력난으로 인해 수년간 시행해 온 제한송전을 해제한 날이다.
이는 해방 이후 최초로 시행된 무제한 송전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한송전 해제는 다소 성급한 결정이었다.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이었기에 하루가 다르게 전력수요가 증가했고,
결국 무제한 송전을 실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한송전을 시행해야 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수년 동안 상황에 따라 제한송전과 해제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8년 8월 22일 제한송전을 전면 해제하였다.
정리 편집팀
출처 『KEPCO IN SEOUL 더 큰 세상 속으로』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 당시 극심한 전력난에 제한송전 실시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 당시 우리나라의 발전시설 용량은 36만 7,000kW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력수요는 43만 5,000kW로 극심한 전력난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긴급조치로 각 산업체에 자가발전기의 설치를 권장했고, 일반 가정에는 백열구의 촉수를 40W 이하로 제한하는 등 강력한 절전정책을 펼쳤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제한송전 전격 해제
-
이어 정부는 1962년 동력자원개발에 역점을 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전을 중심으로 제1차 전원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긴급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왕십리내연발전소(1만 2,750kW)와 발전함 레지스턴스호(3만kW)가 가동됨에 따라 1963년 월동기간에는 동력수용에 대해서만 약 1만kW의 제한송전을 실시하고 일반 가정용과 업무용 전력은 제한송전을 해제했다.
1964년 2월 6만 6,000kW급의 부산화력 1호기를 준공한 뒤 해방 후 최초로 발전용량 53만 1,345kW를 달성함으로써 4월 1일을 기하여 제한송전을 전면 해제하였다. 이로써 해방 이후 19년 동안 계속돼 온 전력기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듯했다.
- 공급보다 빠른 전력수요 상승세, 일찍 터트린 샴페인
-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시적으로 수요전력 이상의 출력을 기록하긴 했으나, 예비전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 성급하게 판매촉진책을 전개한 것이 문제였다. 그동안의 산업화 추진정책으로 전력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한 것을 간과한 측면도 있었다.
1964년 최초의 무제한 송전 이후 날이 갈수록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게 되자 정부와 한전은 다시 긴급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1967년 6월 19일부터 부분적인 제한송전을 시행하였으며, 같은 해 9월 2일부터는 범국민적인 절전운동과 함께 다시 본격적인 제한 송전에 들어갔다. 당시 가능출력은 78만kW였으나 최대수요는 89만kW에 달해 11만kW가 부족했다.
- 자가발전기 도입, ‘한집 한등 끄기’ 등 범국가적 절전운동
-
한전은 예비용 자가발전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호남비료, 충주비료,
동양화학으로부터 총 8,500kW를 수전하는 한편 철도청으로부터 디젤기관차 7대를 대여받아 서울과 부산에서 전차운행용 전력 약 9,000kW를 공급했다. 동시에 자가발전에 따른 보상률을 인상하여 산업체의 자가발전기 도입을 권장하였다.
이와 함께 각 시도에는 절전위원회를 설치하고, ‘한집 한등 끄기’ 등 범국민적인 절전운동을 펼쳤다. 1968년 5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TV 방영시간의 단축과 에어컨·냉장고 등의 사용금지를 지시하기도 했다.
- 화력발전설비 속속 증설 복구로 전력 공급량 증강
-
한전은 전력개발을 통한 전력공급에 사활을 걸었다. 1966년까지 5만 5,000kW가 신·증설되었고, 광주내연, 왕십리내연, 제주내연, 영월화력, 삼척화력, 부산화력, 춘천수력, 영월화력(신규) 등 8개 사업을 신·증설하거나 복구함으로써 총 34만 9,720kW의 전력을 새로 공급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8월 22일 제한송전을 전면 해제하게 되었다.
1968년 제한송전 전면 해제 후 전력수요와 공급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며 무제한 송전의 기류가 이어졌지만 이후에도 제한 송전이 간간히 시행되었다. 정부는 1973년 말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12월 10일 전력수급조절권을 발동해 200kW이상의 산업용 전력에 대해 17%의 절전을 의무화하였다. 또 1974년에는 ‘전력계통 비상시 부하제한 지침’을 제정해 그해 10월부터 39회에 걸쳐 피크타임에 송전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한 1976년과 1977년 예비율이 3.9% 이하로 떨어졌을 때도 3단계 전력비상대책과 공장별 휴일조정제도를 수립해 시행했고, 1977년 4월 1일에도 전기사용 제한 기준을 공시, 가정을 제외한 모든 곳의 조도를 규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 1970년대 대규모 중공업 시설 증가로 무제한 송전 기조 이어져
- 이러한 제한 송전은 경제환경 변화에 따른 비상시국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취해진 조치들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무제한 송전의 기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70년대 들어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생산시설이 규모화됨에 따라 이전처럼 수시로 송전을 제한하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제철이나 전기, 석유화학과 같은 대규모 공업시설의 경우 전력공급이 잠시라도 중단될 경우 그야말로 피해가 막대했다. 한전은 이처럼 전기의 중요성이 커지던 시기,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하는 전력공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