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매실농원의 세월을 품은 2,500여 개의 장독.
  • 매화가 폈다, 그래서 봄인 걸 안다
    광양의 봄날은 늘 꽃으로부터 시작된다. 매화 뽀얗게 터지고 동백꽃 빨갛게 피며 열린다. 그 푸진 꽃밭을 따라 강에서 바다까지 잔잔히 흘러가 보는 것이 광양의 봄날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섰다, 매화 피는 섬진강에. 이맘때 섬진강은 시인 김용택의 표현대로 ‘천지간이 꽃’인 곳이다. 그중에서도 매화마을이라 불리는 섬진마을의 꽃밭이 유독 황홀하다. 섬진강 강줄기를 속 넓게 품고 있는 이곳은 봄바람에 매화 꽃눈이 톡톡 트는 꽃 세상. 감상 포인트는 마을 입구에 있는 섬진나루와 마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둥지를 튼 청매실농원이다. 먼저 수월정과 두꺼비 석상 4기가 놓여 있는 섬진나루부터 찾자. 섬진나루는 진안에서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섬진강 물줄기가 남해바다 목전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곳. 이곳에 서면 살결 푸른 강물 위로 하얗게 드리운 매화 꽃그늘이 가깝게 보인다. 섬진나루를 벗어나면 길은 곧 청매실농원에 닿는다. 섬진강 푸른 물줄기에 발치를 둔 청매실농원은 강과 산, 꽃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16만㎡(5만여 평) 규모의 매원. 항아리 2,500여 개가 도열한 매원 마당을 중심으로 매원을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어떤 길은 여염집 아낙네의 가르마처럼 정갈하고, 어떤 길은 몽실몽실한 운해 속을 흐르는 듯 몽환적이다. 여기에 일부 꽃밭에서는 청보리까지 자라니 참 곱다. 그렇게 하얀 꽃구름 속을 휘돌다 보면 길 끝에서 초가집을 만난다. 영화 〈천년학〉 세트장이었던 이곳에선 마음이 충분히 쉴 수 있을 만큼 오래 머물 일이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대청마루가 섬진강을 향해 있어 꽃밭 너머로 윤슬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강에 흩뿌려진 별들이 수런거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처럼 마음이 흐뭇해질 테다.
    • 배배알도 수변공원에서 바라본 배알도 보도교와 배알도.
    • 옥룡사지의 동백꽃은 3월 중순까지 피고 지다,
      하순이면 뚝뚝 져 내린다.
  • 동백꽃 설운 것을 보니 또 봄이다
    때로 풍경은 슬프다. 너무 찬란해서 아프고 너무 풋풋해서 서럽다. 백운산 자락에 있는 옥룡사지가 그렇다. 풍수지리학의 조상격인 도선국사가 절의 기운을 보하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었다는 곳. 그러나 주인인 절은 오간 데 없고 울창한 동백나무숲만 남았다. 그런 옥룡사지가 어느 때보다 특별해지는 순간이 봄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동백은 붉게 폈다 혈(血)처럼 져야 비로소 봄임을 실감케 하는 꽃이다. 봄날에 옥룡사지에 간다는 건 동백꽃의 서글픈 꽃 잔치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다. 그만큼 봄날의 옥룡사지엔 동백꽃이 낭자하다. 특히 옥룡사지의 동백나무숲은 입구 주차장에서 옛 절터로 올라가는 산책로 주변과 부도탑으로 내려가는 길 주위로 울창하다.

    하지만 옥룡사지에선 부디 동백꽃에만 눈길을 두진 말 일이다. 옥룡사지엔 동백보다 더한 무게로 세월을 산 것들도 있으니. 옥룡사는 신라 말기 승려인 도선국사가 머물며 수백 명의 제자를 양성하다 입적한 곳이고,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만 100여 점에 달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던 곳이다. 그랬던 곳이 텅, 비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동백나무숲과 몇 기의 부도뿐. 상상해보시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옛 절, 그 빈 터가 주는 아스라함을 말이다. 아니, 절터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복원마저 힘든 공간이 주는 허허로움은 꽉 채운 것들이 줄 수 없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를테면 세월만 오롯이 담긴 풍경이고 바람만 드나드는 공간이다.
    광양 매화마을은 매화밭에서 매화꽃을 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 바다로 흐르는 시(詩)의 푸른 숨결
    매화 피고 동백꽃 지는 풍경만 광양의 봄은 아니다. 비록 흐드러진 매화만큼 찬란하지 않고, 핏빛 동백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광양의 산과 바다도 소박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일품이다. 특히 백운산과 망덕포구가 특별하다. 백운산(1,222m)은 광양을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 안은 남도의 명산으로 빽빽한 원시림과 삼나무, 편백나무 등 인공림이 서로 잘 어울려 있다. 봄날엔 이 산언저리에 있는 휴양림을 걷는 기분이 좋다. 1㎞가량 이어지는 ‘황톳길(맨발체험장)’을 맨발로 타박타박 걸으면 싱싱한 봄기운이 몸 가득 스민다. 백운산이 연둣빛으로 물들 무렵 망덕포구엔 벚굴이 가득 피어 반갑다. ‘벚꽃이 필 때 가장 맛있다’라는 벚굴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망덕포구(섬진강 하구)에서 이즈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크기가 웬만한 어른 손바닥만큼 큰 데다 맛까지 탁월해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벚굴의 풍미로 입안이 개운해졌다면 포구 끝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배알도로 향하자. 배알도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보석처럼 박혀, 강이기도 바다이기도 한 지점 특유의 풍광을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 섬에선 푸르고 무른 숨을 쉬기에 더없이 좋다. 배알도 곁, 그 맑은 물가엔 ‘별의 시인 윤동주’를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다. 일제강점기, 시인의 유고가 이 집 마루 밑 항아리 속에서 살아남았다. 꽃들 피고 지는 이 찬란한 계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시를 곱씹는 일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광양 와인동굴로도 길을 잡자. 실제 기차가 다니던 광양제철선의 폐터널을 와인저장고로 단장해 분위기가 독특한데, 터널에 미디어 예술을 접목해 웬만한 꽃밭만큼 환하다. 그 화려한 영상쇼를 보며 와인 한 잔을 맛볼 수 있어 마음에 담기는 ‘봄 숨’이 더 깊고 진하다.

TRAVEL TIP

  • 청매실농원
    • 운영시간 08:00~18:00
    • 축제기간 2026. 3. 13.~ 3. 22.
    • 입장료 성인 6,000원(광양사랑상품권으로 전액 환급)
    • 문의 061 772 4066
  • 옥룡사지
    • 운영시간 09:00~18:00(토 09:00~19:00)
    • 휴무일 매주 수요일
    • 입장료 무료
    • 문의 061 797 2418(옥룡사지 관광안내소)
  • 광양 와인동굴
    • 운영시간 09:30~18:00(매표 마감 17:20)
    • 휴관일 연중무휴
    • 입장료 성인 7,000원
    • 문의 061 794 7788
  •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 운영시간 09:30~18:00
    • 휴관일 연중무휴(시설 점검 시 비정기 휴무)
    • 입장료 무료
    • 문의 061 797 3333(광양시 관광안내소)
광양에 살아보니 차가운 철의 심장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따뜻한 봄을 먼저 알리는 도시, 광양
지서협 광양지사 전력공급팀 대리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저에게 ‘전라남도 광양’은 지도 끝에 매달린 낯선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광양이 제 생각처럼 차가운 회색빛 산업 도시가 아니라, 뜨거운 에너지와 눈부신 자연이 묘하게 공존하는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첫 발령지로 이곳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저는 이 도시에 가졌던 오랜 관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력공급팀 업무 특성상 다양한 현장을 누비다 보면 광양의 구석구석을 조금 더 가까이서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광양제철소의 위용을 보았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설비들을 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제철소인 만큼 우리나라 경제가 바로 이곳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더욱이, 그곳으로 이어지는 선로들을 보며 전력공급을 통해 국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바다 위로 펼쳐지는 제철소의 불빛들과 이순신대교의 화려한 조명들은 누군가에겐 치열한 일터겠지만, 저에게는 이 도시가 만들어내는 현대적인 예술처럼 다가왔습니다.

광양에서 생활하며 깨달은 점 하나를 꼽자면, ‘공존의 가치’입니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산업단지가 대자연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광양제철소, 그 거대한 철강의 요새를 조금만 벗어나면 반전처럼 펼쳐지는 눈부신 자연경관이 있습니다. 특히 3월의 광양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섬진강 변을 따라 끝도 없이 피어나는 매화꽃은 제철소의 도시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서정적입니다. ‘광양매화축제’가 열릴 때면 꽃 몽우리는 어느새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매화축제 전력 확보 업무에 힘썼던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듯 하얀 꽃송이가 어깨 위로 내려앉습니다.

광양은 취할 거리로 가득합니다. 술 이야기가 아닙니다. 화려한 야경에 취하고 싶을 땐 이순신대교, 꽃향기에 취하고 싶을 땐 섬진강 매화마을, 맛에 취하고 싶을 땐 망덕포구와 광양 불고기 특화거리로 향하면 됩니다. 여러분 역시 광양에 취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서울 토박이였던 제가 이제는 지인들에게 여행지로 광양을 추천하곤 합니다. 차가운 철의 심장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따뜻한 봄을 먼저 알리는 도시. 광양의 매력을 여러분도 꼭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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