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의 이면에는 전기, 가스, 석유 등 다양한 에너지가 24시간 쉼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에너지가 갑자기 끊긴다면 어떨까? 중동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를 지키는 ‘에너지 안보’에 대해 조명해본다.
- 에너지가 멈추면 우리 일상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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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천연가스 공급이 대폭 줄어들며 난방비가 폭등했고, 일부 공장들이 가동을 멈췄다. 당시 IEA(국제에너지기구)는 1974년 창설 이래 처음으로 한 해에 두 차례나 비축유를 방출하는 이례적인 조처를 해야 했다. 이처럼 에너지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중동지역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우리나라 주유소 기름값도 덩달아 오른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방패가 ‘에너지 안보(Energy Security)’이다. 쉽게 말하면 “전쟁, 재난, 가격 폭등 같은 일이 생겨도 우리나라가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끊기지 않게,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 에너지 안보, 이제는 이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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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에너지 안보를 단순히 “석유나 가스를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사오는 것” 정도로 정의했다. 창고에 식량을 넉넉히 쟁여두면 마음이 든든했던 것처럼 중동에서 원유를 안정적으로 들여오고 비축유를 충분히 확보해 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시대를 맞아, 현대의 에너지 안보는 훨씬 입체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제는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모두 “YES”라고 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에너지 안보를 갖춘 국가라 할 수 있다.
- “끊기지 않는가?”(공급 안정성) : 외부 충격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지 않고, 만약 끊기더라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는가.
- “너무 비싸지 않은가?”(경제적 형평성) : 국민과 기업이 부담 없이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고, 에너지 빈곤층이 발생하지 않는가.
- “환경을 해치지 않는가?”(환경 지속가능성) :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에너지 수요를 충족하고, 미래 세대에게 깨끗한 지구를 물려줄 수 있는가.
- “시스템이 안전한가?”(기술적 안전성) : 전력망이 튼튼하고 사이버 공격이나 기술적 장애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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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에너지 트릴레마’ -
이 목표들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계에너지협의회(WEC)는 이런 어려움을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2012년 WEC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세 가지 목표가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를 개선하려고 하면 다른 쪽이 나빠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의미한다. 트릴레마의 세 축은 다음과 같다.
- 에너지 안보 : 공급원 다변화, 비축 능력, 전력망 신뢰도 등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급 역량
- 에너지 형평성 : 소득 수준이나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합리적인 가격에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
- 환경 지속가능성 : 온실가스 감축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유지하는 것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에너지 안보를 위해 값싼 석탄 발전을 늘리면 단기적으로는 공급 안정성과 가격 형평성은 좋아지지만, 환경에는 큰 부담이 된다. 반대로 재생에너지를 급격히 늘리면 초기 투자비로 인해 요금이 오르고, 날씨에 따른 출력 변동으로 안정적인 공급이 흔들릴 수 있다.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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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성적표:
A급 형평성과 저렴한 요금의 이면 -
우리나라는 에너지 트릴레마 측면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고 있을까? 세계에너지협의회(WEC)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에너지 형평성 부문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한다. 전국 어디서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연간 정전시간 10분 내외),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요금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나라는 전체 1차 에너지의 94%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석유의 80% 이상을 중동 지역에서 가져오고 있어 지정학적 리스크에 매우 취약한 구조이다. 게다가 주변국과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전력섬’ 특성상, 유럽처럼 이웃 나라에서 전기를 받아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저렴한 전기요금의 이면’도 짚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낮은 전기요금은 국민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어 형평성 점수를 높였지만,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관점에서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에서 요금이 지나치게 낮게 유지될 경우,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한다는 ‘가격 신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국가적인 에너지 과소비로 이어지기 쉽다. 또한 2022년 글로벌 에너지 위기처럼 국제 연료 가격이 폭등할 때, 이를 요금에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면 그 거대한 충격이 전력공급 시스템 전체의 재무적 위기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앞으로 노후 설비 교체, 재생에너지와 송배전망 투자, 원전의 안전성 강화 등이 본격화되면서 전기요금의 ‘현실화’ 압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 안보와 환경 보호를 위해 필요한 투자를 하면서도 국민과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요금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과제이다. 에너지가 가진 본연의 가치와 수입 비용을 합리적으로 반영하는 요금 체계야말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국가 전체의 에너지 안보를 튼튼하게 다지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023년 주요국 에너지 트릴레마 지수 및 종합 순위
| 국가 | 에너지 안보 | 에너지 형평성 | 지속가능성 | 종합 점수 | 2023년 순위 | 순위 변동 (’22년 대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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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 72.2 | 95.8 | 83.5 | 83.2 | 1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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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 73.4 | 93.4 | 85.0 | 83.1 | 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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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 75.9 | 92.3 | 80.8 | 82.7 | 2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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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 64.5 | 98.1 | 85.7 | 82.1 | 3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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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67.7 | 95.7 | 79.2 | 80.0 | 8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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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72.7 | 97.3 | 69.0 | 78.9 | 10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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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91.1 | 94.0 | 71.4 | 75.0 | 2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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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62.2 | 95.9 | 63.9 | 73.1 | 27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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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66.3 | 73.0 | 56.4 | 64.4 | 47 | ⇩ 5 |
- 위기를 기회로: 함께 만드는 에너지 미래
- 에너지 안보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정부와 기업의 정책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고, 각자의 자리에서 에너지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가 모두 작은 ‘에너지 안보 지킴이’가 된다면, 그 힘이 모여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IEA, Overcoming the Energy Trilemma(2023) / 경영연구원, 국가 에너지 안보를 고려한 에너지 전환 추진 전략(2022) / 경영연구원,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 고려해야 할 7가지 요소(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