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다. 프로포절(졸업논문 연구계획 발표)을 3시간 앞두고 학생이 잠수를 탄 것이다. 전화는 받지 않고 카톡 메시지도 읽지 않는다. 여기저기 연락을 시도했지만, 발표 1시간 전까지도 연락은 닿지 않았다. 결국 다른 교수님들께 양해를 얻어 프로포절을 포기했다. 며칠 후,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 학생이 어물쩍 사과했다. “죄송해요.” 어떤 교수님께 들은 실화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학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문제가 생기면 도망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흔히 ‘회피형 인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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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회피형 인간이라 부를까? 삶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누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며,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어떤 사람은 직진하며 돌파를 시도하고, 또 다른 사람은 협력하거나 우회 전략을 택한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피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회피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사실 회피형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갑자기 등장한 신인류는 아니다. 오래전부터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많았으며, 증상이 심할 경우 회피성 성격장애로 진단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사회적 상황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을 갖고 지속적인 회피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관계를 맺기 힘들어한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걱정해 중요한 일을 맡기를 꺼리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문제 자체를 무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쉽고, 외로움이나 우울감, 불안감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등 자존감 문제도 발생한다. -
회피형 인간이라도 괜찮아? 절대 괜찮지 않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대부분의 회피형 인간은 어떤 조직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이로 인해 개인은 물론 조직에도 어려움을 만든다. 회피형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꺼려 팀워크를 약화시킨다. 특히 불편한 대화나 갈등 상황에서 개선의 의지가 없으며 단순하게 자리를 피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스스로 힘들 뿐 아니라 동료에게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준다. 혹시나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 조직은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업무적인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 될 수 있다. 일단 업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능한 책임질 일을 맡으려 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에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리더의 위치가 되면 더 끔찍해진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피하려고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업무 마감일을 지연시키는 등 조직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한,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타부서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 한다. 따라서 조직 전체의 업무 효율성 저하 및 조직 내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 위하여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 회피형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회피형 인간의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언 발에 오줌 누기 혹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와 같은 전략인 셈이다. 그렇다면 회피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들의 반응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작고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성공 경험을 쌓아 나가는 것이 좋다. 예시로는 피트니스 클럽에서 무게를 올리거나 몸무게의 숫자를 낮추는 방법이 많이 언급된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회피 성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두려워하며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회피형 인간은 이 감정들을 자신만이 느끼는 매우 특별한 감정이며, 그 강도 또한 타인들에 비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타고난 기질의 영향일 수도 있으나 주로 과거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스스로 일기나 명상 등을 통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여 전반적인 불안감과 예민함을 줄이는 것도 회피 성향 극복에 도움이 된다. 자신만의 스트레스 관리 방안을 찾는 것이 좋다. 특히 직장에서는 시시각각 스트레스 상황이 유발되므로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 루틴을 개발하는 것도 좋다. 예를 들면, 화장실과 같은 분리된 공간에서 귀여운 동물이나 아기가 나오는 동영상을 잠시 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결국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이 내 인생에 출연할 수는 있으나 그들은 단지 조연에 불과하다. 주인공은 항상 나 자신이다. 어찌 보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임을, 내가 속한 조직의 주인임을 자각한다면 조연들의 오지랖쯤은 하찮게 느껴질 것이다. 주인공은 주인공의 역할을 해야 한다. 앞에 놓여있는 작은 불편함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자.
글.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