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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키는
모래 한 줌의 힘
글 박상현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기자
바다가 모래를 삼키고 있다. 기후변화로 높은 파도가 자주 일며 백사장의 모래를 바다로 훔쳐가고 있다. 전국 백사장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이미 깎여나가고 있다. 백사장은 단순한 모래밭이 아니다. 수많은 연안 생물들의 보금자리이자, 강력한 파도 에너지를 흡수해 태풍이나 폭풍우가 올 때 내륙의 사람들을 지켜주는 자연 방파제다. 우리가 밟고 걸으며 추억을 쌓고 바다를 즐기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백사장이 조용히 줄어들고 있다. 5년 새 눈에 띄게 면적이 줄어든 백사장에 섰다. 모래가 입에 들어간 듯 씁쓸하고 텁텁했다.
- 우리가 밟던 모래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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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 경북 울진군 직산1리의 해변을 걸었다. 과거 백사장이었던 공간에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다. 5년 전쯤 모래 유실을 막으려 200m 길이로 깔아둔 테트라포드(뿔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 라인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그 틈으로 파도가 들고나며 백사장의 모래를 바다로 훔쳐갔다. 파도를 막으라고 백사장에 세워둔 테트라포드는 이미 물속에 반쯤 잠겨 제 구실을 못했다. 모래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인근 민박집 주인은 “여름 한철 민박 장사를 하는데 백사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라고 했다.
백사장이 사라지고 있다. 기후변화로 고(高)파랑이 늘어나며 바다가 백사장의 모래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런 현상을 ‘연안 침식’이라 부른다. 파도·조류 등으로 해안선의 모래가 바다로 빠져나가면서 백사장이 깎이고 사라지는 현상이다. 우리가 밟고 걸으며 바다를 즐길 수 있던 공간이 기후 충격에 극도로 취약해지면서 조용히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다가 펄펄 끓을 때 연안 침식은 심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최악의 연안 침식이 발생한 건 2024년. 당시 전년도부터 이어진 엘니뇨(태평양 특정 구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게 유지되는 현상)의 여파로 겨울까지 강한 대류 활동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고파랑 현상이 잦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양수산부는 해마다 전국 해안의 백사장 폭과 넓이를 측정해 침식 등급을 매기는 ‘연안 침식 실태 조사’를 발표하는데, 이때 국내 해변 10곳 중 6곳 이상이 깎여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가 가장 큰 바다는 동해로, 조석간만의 차가 적은 데다 먼바다에서 강한 파도가 연안을 직격하는 지형적 특성상 기후변화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고 있다.
- 사라지는 백사장을 지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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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은 단순한 모래밭이 아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파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백사장이 줄어든다는 건 연안 재해 방어벽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파도가 해안도로나 해안에 인접한 주택가를 직접 때리게 되고, 태풍이나 폭풍우가 올 때 바닷물이 내륙으로 훨씬 더 깊숙이, 더 빠르게 밀려들어 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실제로 강원도 삼척시 맹방해변과 강릉시 안목해변에선 최근 수년간 모래가 빠르게 사라지면서 축대 붕괴 사고 등 구조물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백사장은 수많은 연안 생물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모래 유실은 해안 생태계 파괴를 유발한다. 깨끗한 모래밭에 굴을 파고 살며 ‘해변의 청소부’라는 별명을 가진 달랑게와 밤게 등이 살 곳을 잃게 되고, 매년 봄·가을마다 수천㎞를 비행해 우리나라 해안가에 들러 게들을 먹고 영양 보충하는 도요새와 물떼새 등 나그네새들의 먹이사슬도 끊어지게 된다. 통보리사초, 갯메꽃처럼 모래를 움켜쥐어 해안사구를 유지해 주던 염생식물(소금기가 있는 땅에서 자라는 식물) 군락도 함께 무너지면서 해안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백사장으로 먹고사는 바닷가 마을의 경제적 타격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의 ‘해변 경제성 조사’ 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오하이오 등 해변 관광이 활성화된 지역에서 모래 유실로 해변 환경이 악화돼 매력도가 떨어질 경우 지역 관광 소비 지출이 30~35% 급감하고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플로리다주 환경보호부에선 심각한 침식 구역을 방치했을 때 해안가 상권이 직격탄을 맞아 매출이 평균 35% 이상 감소하며, 주(州) 전체적으로 연간 약 24억 달러(약 3조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모래의 실종이 결국 지역 사회의 소멸을 야기하는 경제적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많은 지자체가 막대한 세금을 들여 외부에서 모래를 실어다 붓는 ‘양빈(養濱)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방파제에 쓰는 테트라포드를 백사장 위에 깔아 파도가 힘을 잃도록 하는 방법도 쓴다. 하지만 이런 임시방편으로는 자연의 힘을 오래 거스를 순 없어서, 큰 태풍과 폭풍우가 닥치면 모래는 또 금세 사라지게 된다. 이 도돌이표 같은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시간 정도 망가진 해변을 걷다가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손질된 생선들이 빨랫줄에 걸려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백사장이 있는 한 이 식당도, 반건조 생선들도, 비릿한 바다 내음도 이곳의 풍경을 채울 것이다. 이 모습을 되도록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밥을 한 술 뜨려는 데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그 맛이 모래가 입에 들어갔을 때처럼 텁텁하고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