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 MISSION
주차장의 전기차, 전력망의 ‘유연자원’이 되다
충전을 ‘자원’으로 바꾸는
V2G 제어, 어디까지 왔나
글 장동식 전력연구원 차세대배전연구소 DSO Pjt.팀 책임연구원
주차장에 세워둔 전기차 한 대를 떠올려 보자. 그 안에는 60~80킬로와트시(kWh), 일반 가정이 며칠은 쓸 수 있는 전기가 담겨 있다. 지난 4월 우리나라 전기차는 누적 100만 대를 넘어섰고, 자동차는 하루의 약 95%를 주차장에서 보낸다. 이 배터리들을 모두 합치면 최대 수십 기가와트시(GWh), 순간 출력으로도 수 기가와트(GW)에 달하는 규모가 될 수 있다. 원전 대여섯 기에 맞먹는 미활용 에너지가 우리 주변에 잠자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한꺼번에 활용할 수 있는 양은 이보다 적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분명하다. 세워둔 전기차를전력망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술, 그것이 V2G(Vehicle-to-Grid)다.
- 충전이 ‘자원’이 되는 길 ‐ 핵심은 ‘오케스트레이션 제어’
- 지금까지 전기차와 전력망의 관계는 한 방향이었다. 전력망은 전기를 주고, 전기차는 받았다. V2G는 이 흐름을 양방향으로 넓혀, 필요할 때 전기차에 담긴 전기를 다시 전력망으로 내보낸다. 다만 V2G의 핵심은 ‘전기를 거꾸로 보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전기차를 전력망 상황에 맞춰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션 제어’에 있다. 통신과 제어가 더해지면서 전기차 충전은 단순한 ‘부하’에서 전력망을 돕는 ‘자원’ 으로 발전해 왔다. 정해진 시간에 충전만 하던 방식에서, 전력망 사정에 맞춰 충전 시점을 조절하는 제어형 충전(V1G)을 거쳐, 충·방전을 양방향으로 제어하는 V2G로 나아간 것이다. 전기차를 ‘움직이는 에너지저장장치(Mobile ESS)’처럼 쓰되, 운전자마다 다른 출차 시간과 충전 상태를 고려해 운행에 필요한 전기는 남겨 두면서, 전국에 흩어진 차량을 전력망이 믿고 쓸 수 있는 하나의 자원으로 묶어내는 것이 V2G 제어 기술이다.
- 왜 V2G인가 ‐ 재생에너지의 무대는 ‘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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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G가 주목받는 이유는 전기차 보급과 별개로 진행된 전력망이 맞은 변화에 있다. 태양광과 풍력이 늘면서 재생에너지가 주로 연결되는 곳은 송전망이 아니라 우리 동네 ‘배전망’이다. 2024년 기준 재생에너지 배전 연계 용량(25.5GW)은 송전(9.1GW)을 크게 웃돌고, 태양광 발전 설비의 대부분이 배전망에 연결돼 있다.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는 한낮에 전기를 많이 생산하지만, 전력 수요가 큰 저녁에는 출력이 급감하여, 시간대별 수급의 출렁임이 커진다. 남는 전기를 저장하지 못하면 발전을 줄이거나 귀한 재생에너지를 버려야 하는 출력제한이 발생하는데,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제주도에서 이미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재생에너지 설비가 늘어 2030년이면 최대 전력수요의 절반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재생에너지가 늘수록 수급의 균형을 잡아 줄 유연한 자원이 더 필요해진다는 뜻이다.
이 변동을 받아내려면 양수발전소나 배터리 저장장치(BESS)를 새로 지어야 하지만 큰 비용과 오랜 시간이 든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미 거대한 ‘저장장치’가 빠르게 늘고 있다. 바로 전기차다. 이미 보급된 전기차가 쉴 때 유연한 자원으로 활용하자 — 이 발상이 V2G의 출발점이다.
- 한전, 세계 최초의 AC V2G 현장 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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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은 이 분야에서 일찍부터 실증을 쌓아왔다. 한전 전력연구원은 2015년부터 V2G 선행연구를 시작했고, 2018년부터는 현대자동차 등과 함께 V2G 제어시스템 개발과 실증 연구를 주관해 왔다. 그 과정에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실제 양산차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AC V2G 현장 실증을 완료했다. 역할을 나누어, 양방향 충·방전이 가능한 차량 개발은 현대차가 맡고, 충·방전 인프라 구축과 이를 지휘하는 통합 제어·운영시스템 개발, 그리고 전국 단위 현장 실증은 한전이 담당했다. 실증은 실험실이 아니라 서울·충청·전라·제주 등 전국에서 일반 고객이 참여한 가운데, 양방향 탑재형 충전기(OBC)를 갖춘 아이오닉5 100여 대를 모집해, V2G 충·방전 인프라를 구축하고 약 14개월간 운영했다. 참여 고객도 일반 개인부터 렌터카·기업까지 다양해, 실제 사용 환경에 가까운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
한전은 처음부터 차량에 내장된 OBC를 활용하는 교류(AC) 방식에 주목했다. AC 방식은 충전기를 오래 연결해 둘 수 있어 충·방전을 제어할 시간 여유가 크고, 별도의 양방향 인버터가 필요 없어 인프라 비용을 기존 완속 충전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향후 V2G 대량 보급의 관건이 비용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접근이다. 전기차는 충전 패턴이 제각각이고 운행 중에는 쓸 수 없어, 이를 전력망이 믿고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다루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차량·충전기·제어를 아우르는 전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검증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다.
실증은 지금도 이어진다. 한전 전력연구원을 포함한 15개 기관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전국 1,500대 규모의 대규모 상용화 실증 연구를 진행하며, 국제표준에 기반한 V2G 플랫폼을 상용화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마침 2024년 6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시행되고 제주도 등이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전기차를 지역 유연자원으로 활용할 제도적 토대도 갖춰지기 시작했다. 제주 특화지역의 V2G 시범사업과 정부의 V2G 상용화 전략 마련에도 그동안의 실증 경험이 토대가 되고 있다.
한전의 현장 실증은 V2G를 둘러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세 가지 질문에도 답을 내놓았다.- “충·방전을 자주 하면 배터리가 망가지지 않나요?” 가장 많이 듣는 걱정이다. 하지만 실증에서는 30만㎞ 이상 주행에 해당하는 장기간 동안 잦은 충·방전에도 일반 충전 대비 성능 저하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현대차·기아는 국내 V2G 실증에 참여하는 차량의 배터리 보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해외 전기차 OEM(제조사)들도 비슷한 보증을 하고 있다. 배터리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얕게 충·방전하는 제어 기술 덕분이다.
- “전기차가 늘면 전력 계통이 위험해지지 않나요?” ‘쓰기 나름’이다. 많은 전기차가 제어 없이 동시에 충전하면 부담이 되지만, 충전 상태를 예측해 정밀하게 제어하면 오히려 전력망을 돕는 자원이 된다. 한전은 실증을 통해 오차를 5% 수준으로 관리하는 제어 성능을 확인했다. 여러 대의 전기차를 전력망이 믿고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그렇게 번거로운 걸 누가 참여하나요?” 뜻밖에도 호응이 낮지 않다. 한전 전력연구원이 국내 전기차 운전자 2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약 70%가 참여 의사를 보였다. 전기가 쌀 때 충전하고 비쌀 때 되팔아 부수입을 얻을 수 있는 데다, 절차도 점점 자동화되고 있어 차를 충전기에 꽂아두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운전자와 전력망이 win-win하는 V2G 효과
- V2G의 효과는 여러 방향이다. 차주는 전기가 쌀 때 충전하고 비쌀 때 방전하거나 수요반응(DR)에 참여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전기차 한 대의 연간 충전비가 수십만 원에 이르는 점을 떠올리면, 그 가격 차이를 활용한 보상은 적지 않은 유인이다. 여러 대를 묶으면(가상발전소·VPP) 전력시장에 자원으로 참여하거나 주파수 조정 같은 보조서비스, 기업의 RE100 이행에도 활용할 수 있다. 전력망 차원에서는 저녁 피크를 낮추고 지역의 잉여 재생에너지를 흡수해 출력제한을 줄인다. 특히 배전망에서 가치가 큰데, 변전소를 새로 짓는 대신 V2G로 국부적인 과부하에 대응하는 ‘비배전망 대안(NWA)’으로 설비 투자를 미루거나 줄일 수 있다. 발전소나 대형 ESS를 새로 짓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다만 V2G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 자원은 아니며, 고정형 ESS·수요반응과 함께 배전 유연자원을 이루는 한 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표준과 인증체계, 제도적 기반 마련이 과제
- 물론 남은 과제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V2G를 지원하는 차종이 아직 많지 않고, 서로 다른 차량과 충전기가 호환되도록 하는 표준과 인증 체계가 더 갖춰져야 한다. 차주의 참여를 이끌 전기요금 체계와 보상 제도, 전기차가 전력망과 전기를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기반도 마련이 필요하다. 지난해 12월부터 기후에너지환경부가 V2G 협의체를 구성해 산·학·연과 함께 이런 과제를 풀어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의 가능성을 제도가 뒷받침할 때 비로소 V2G는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다.
- 전기차가 더해갈 전력망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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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은 밝다.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V2G로 활용 가능한 자원도 점차 커질 것으로 정부는 추정한다. 재생에너지가 빠르게 늘어 앞으로 유연자원이 부족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전기차는 그 공백을 메우는 자원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영국은 충전기를 오래 연결해 두면 무료 충전으로 요금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상품을 선보였고, 미국에서는 스쿨버스 V2G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독일 등도 실증을 넓히고 있다. 미국은 분산자원이 전력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일본과 유럽도 V2G의 법적 지위와 이중 과금 문제를 손질하는 등 제도 기반을 다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전기차가 수요 측에서 중요한 유연성 자원이 될 것으로 본다. 국내 배전망도 점차 지역 단위로 유연성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곳곳에 분산된 전기차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다.
주차장에 세워둔 전기차가 전력망을 떠받치는 일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은 현장 실증으로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제 제도와 표준이 그 뒤를 받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다음에 자동차 전시장을 방문하여 전기차를 고를 때, 한 가지 질문을 더해 보자. “이 차, V2G가 되나요?” 그 작은 관심이 모이면, 우리 주차장의 전기차들이 우리나라 전력망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