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주요 전원으로, 당시 대단위 화전으로는 하나뿐이었던 영월화력발전소.

1948년 5월 14일 정오. 갑자기 남한 전역이 암전됐다. 전기요금 미납 등을 이유로 북한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단전을 실시한 것이다. 평양 제1변전소에서 수색변전소로 이어지는 평양선의 송전기가 끊겼고, 왕십리선·옹진선·개성선·한강선 등 북한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 모든 송전선이 차단됐다.

그나마 대낮에 단전이 발생했기에 가정이나 사무실에선 혼란이 덜했지만 대낮이라 해도 갑자기 기계가 가동을 멈춘 공장이나 달리던 전차가 급정차한 거리에선 혼란이 극에 달했다. 한마디로 남한 사회의 모든 기능이 일시에 ‘Off’ 됐다.

해방 전 남한의 전력수요가 10만kW 정도였는데 이 수요를 남한의 발전설비로는 충당할 수가 없어 사용량의 5~70%에 달하는, 평균 5만kW 이상의 전력을 북한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남한의 주요 전원으로, 당시 대단위 화전으로는 하나뿐이었던 영월화력발전소.
해방 후 북한과 전력공급 분쟁
해방 이후 2년여까지는 전력공급이 충분하지 못한 남한이 북한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47년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소련군정이 미군정에 해방 이후 남한으로 송전한 전력의 요금을 청구한 것이다. 소련군정은 400만 달러의 전기요금을 쌀과 전기용품으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미군정과 소련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의 전기요금, 400만 달러를 기계나 전기용품 등으로 환산해 지불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정은 이후 1차로 소련군정이 요구한 전기요금의 35%에 해당하는 각종 기계와 전기용품, 기타물자를 북한에 보냈다.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10억 원 이상이 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정은 보내온 물자가 전기요금의 10%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품질이 불량하다면서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1947년 10월에 열린 제2차 남북전력협정이 실패로 끝나자 소련군정은 장비와 선로의 고장을 이유로 송전량을 5만kW 이하로 제한하겠다고 통고하고는 그해 12월부터 실제로 공급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전력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전력공급량의 70% 정도를 북한의 송전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북한의 5·14 단전을 보도한 신문기사(동아일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국을 환영하는 꽃전차 운행.
소련군정의 일방적인 단전
미군정은 소련군정의 전력공급 감소정책에 대응해 전기 사용 합리화를 추진하고, 독자적 전력 확보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발전소 건설은 엄청난 자금과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2차 전력협정이 실패한 이후에도 북한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전력공급을 받기 위해 소련군정이 요구했던 전기요금의 약 40%에 해당하는 대상 물자를 2차분으로 준비해 놓고 북한이 인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현재 물가로 환산했을 때 10억 원을 상회하는 분량이었다.

그런데 남북한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7월 10일 사실상 결렬되면서 미국이 전격적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에 제출했다. 미국의 제안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총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1월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소련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는 동안 유엔에서는 한국위원회 활동이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의결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가 실시됐고,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국회를 구성했다.

이어 총선거 나흘 뒤인 5월 14일 북한과 소련군정은 전력대금 미지급을 이유로 전격적인 단전을 실시했다. 그들이 주장한 단전의 이유는 약정된 남한 송전 요금을 미군정이 청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단전으로 인한 전력난 가중
북한의 일방적이고도 갑작스러운 단전으로 인해 남한은 큰 혼란과 괴로움에 봉착했다. 가까스로 가동해 오던 생산시설들이 속속 문을 닫았고 일반 가정에도 윤번제나 격일제로 송전을 했다. 정부기관 역시 심각한 전력난으로 전력공급을 제한했으며 공장을 가동 중인 생산시설 역시 시간제로 기계를 가동해야 했다.

전력난 극복을 위해 미군정은 단전 직후부터 발전시설의 최대 가동을 지시하고 이어 5월 18일부터는 기획배전과 윤번제 배전을 실시했으며 가정용 전등의 30W 이상 사용을 금지했다. 신문에 ‘전기를 켜고 잠을 자는 사람은 처벌할 것’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을 정도였다. 수요관리에 사력을 다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전력부족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했다. 당시 주요 생산 시설의 하나였던 주물공장의 경우 작업 중 정전으로 인해 용해로가 굳어버리는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농번기 관개용 전력을 공급하지 못해 쌀 생산이 타격을 받았고, 전차운행도 대폭 축소돼 교통대란이 일어났다.

이에 영월화력발전소 보수공사를 긴급 실시했고, 영월탄광의 채탄량 증대를 위해 발전소와 탄광을 조선전업에서 상공부 직할로 이관시키기도 했다. 당인리화력발전소의 발전량 증대를 위해 일본 유연탄의 수입을 추진했고, 목포 중유발전소 신설과 섬진강 댐 확장공사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책만으로 남한 전력수요의 절대 부족량인 7~8만kW를 확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마저도 ‘남북분단’이라는 한반도의 비극에 비하면 서막에 불과했다.
광복 당시의 전국 발전설비
출처: 『조선전업주식회사 1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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