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전투 속, 목숨 걸고 전력설비를 복구한 전력인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수백만 명의 인명과 천문학적인 재산손실을 가져온 민족 최대 비극이었다.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산업생산 시설과 주택이 대부분 파괴됐다. 이 전쟁은 특히 어렵게 수립되어 가던 남한의 전력자립의 가능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한국전쟁 발발 1개월 전인 1950년 5월 7만 3,557kW였던 남한의 평균전력이 8월에는 1만 1,333kW로 감소했다. 이후 전투가 치열해지며 남한 수력의 56%, 화력의 52%에 달하는 전력시설이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한 전력시설 손실액만 총 2,730억 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전력설비 복구에 나선 전력인들의 희생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로 변한 대지 위에서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냈다.

9·28 수복으로 서울에 복귀한 전력회사들은 즉시 당인리발전소, 영월발전소 등에 대한 긴급 복구에 나섰다. 이후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하하여 영월화력, 청평수력 등이 다시 피해를 입고 전력난이 극심해지자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도 전력회사들은 긴급 복구공사를 재개했다.

1951년 4월 전쟁이 휴전선 상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전력시설 복구공사가 시작됐다. 영월화력발전소와 칠보수력발전소 등 발전시설의 복구공사 진전으로 출력은 점차 증가됐다. 이로 인해 1951년 5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비해 9,600kW가 증가된 3만 8,800kW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이어 당인리화력 2호기, 청평수력 2호기, 화천수력의 탈환과 복구가 이어졌다.
한국전력주식회사의 사옥.
1961년 6월 24일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전기 3사 사장의 합병계약서 조인.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기념식.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치하를 하고 있다.
전원개발계획, 전쟁이 끝나기도 전 수립되다
정부도 전쟁이 미처 끝나기 전에 전원개발에 주목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이던 1952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긴급 전원 대책의 하나로 신규전원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2월 6일에는 <전원개발계획 실시요령에 관한 건>을 국무회의에 제안, 통과시켰다. 이를 토대로 1953년 11월 6일 상공부 내 전원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제1차 전원개발 3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전후복구사업을 원조하고 있던 경험 미숙과 자본 및 기술력 부족, 미국 대외활동본부(FOA)의 간섭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수차례 수정을 거듭하며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끝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1961년까지 이어진 전후 12차례의 전원개발계획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전후복구를 추진해야 했던 약소국의 한계였다.
3사 통합과 한국전력주식회사의 탄생
일제 35년의 암흑시대가 끝나고 이 땅에 광복의 물결이 밀려왔을 때 한반도에는 발전회사인 조선전업과 배전회사인 경전, 남전, 서전, 북전 등 5개 회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 쪽에는 1개의 발·송전회사(조선전업)와 2개의 배전회사(경성전기, 남선전기)가 남게 되었다. 이들 3사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신규 개발을 통한 전력 증강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기존 시설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 실정이었다. 이런 현실로 전기 3사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에 가속도가 붙었다. 과다한 전력 손실, 낮은 노동 생산성, 고가의 전기요금 등 산적한 문제들을 전기 3사의 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처럼 당시 전기 3사 통합은 국민적 바람이 되었다. 이에 1951년 5월 2일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전기 3사 통합안이 의결된 바 있다. 이어 휴전 후 전기 사업체 개편론이 다시 강력하게 대두됐다.

정부는 1953년 6월에 상공부 장관의 자문기관으로 ‘전기사업임시 조정회’를 구성해 통합을 위한 기초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통합업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민간 주주와 노동조합의 끈질긴 반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정부와 전기 3사, 혹은 전기 3사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새로 집권한 정부는 통합을 통한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맞춰 민간 주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1961년 6월 23일 국가 재건최고회의에서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을 전격 의결·공포하였다. 10여 년을 끌어온 전기 3사 통합이 마침내 확정되고 통합전력회사 출범이 가시화되었다. 5·16 군사정변이 끝난 지 불과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다음날인 24일 3사 합병 당사자인 전기 3사 사장들이 합병 계약을 체결하였다. 다시 이틀 뒤인 26일에는 각각 주주총회를 열어 해산 결의를 했으며, 28일에는 경성전기 회의실에서 한국전력주식회사 주주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역사적인 한국전력주식회사의 탄생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법안이 의결된 지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새 출발한 한전의 전원개발 5개년 계획
국민적 여망을 안고 새롭게 출발한 한전은 3사 통합으로 인한 초기 혼란을 극복하고 3사의 부진했던 사업의 조속한 처리에 주력하였다. 먼저 경영능률 제고를 위해 기구 개편과 인력 정비를 단행하였고 회사 경영에 운영계획 제도를 도입하였다. 성과주의와 예산제도, 심사분석제도 역시 도입했으며 고정자산에 대한 자산 재평가도 실시하였다.

이어 조직과 제도를 정비한 한전은 제1차 전원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의욕적으로 전원개발사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긴급전력대책으로 추진된 발전함 도입 등으로 4만 9,000kW의 설비를 조기 준공하였으며 8개 계획사업의 신증설로 35만 3,100kW의 설비용량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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