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한국의 밤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K-야간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한국의 밤은 깨어난다.
박물관 같았던 고궁은 독특한 옛 감성을 오감으로 경험하는 공간이 되고,
건축물들은 거대한 미디어아트의 캔버스가 되며,
평범했던 골목길은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있는 퇴근길 일상의 낭만이 된다.
글 정덕현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서울특별시,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국가유산진흥원, 한국관광공사, 서울디자인재단
[BAM] : NIGHT
of
KOREA
of
KOREA
- 달빛, 별빛 아래 고궁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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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고궁이 웅장한 건축물을 감상하고 역사적 사실을 습득하는 박물관 체험 같다면, 밤의 고궁은 조선시대 왕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시간여행에 가깝다. 저마다 청사초롱 하나씩 손에 들고 은은한 조명에 도드라진 고궁의 단청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조선시대의 시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밝은 낮에는 너무 선명해 오히려 잘 보이지 않거나 입체감이 덜 느껴지던 것들이, 어두운 밤에는 그 음영 속에서 생생히 살아난다. 마치 사극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그 압도적인 경험 속에서, 외국인들의 ‘원더풀’이 터져 나온다. 한국의 고궁이 낭만으로 되살아나는 특별한 밤의 풍경이다.
고궁 야간개장의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G20 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해 처음으로 야간의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됐고, 큰 인기를 끌면서 국가유산청이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특별 프로그램으로 연례화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자리를 잡은 고궁 야간개장은 관람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단순 개방이 아닌 식사와 공연까지 결합된 프로그램으로 진화했다. ‘경복궁 별빛야행’이나 ‘창덕궁 달빛기행’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매년 치열한 예매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단지 고궁의 야경을 보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궁궐의 부엌이었던 외소주방에 앉아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일상식이었던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슭수라상’을 맛보며 국악공연을 감상하고, 식사 후에는 전문 해설사의 안내로 자경전과 장고로 이동해 장고마마와 나인의 작은 연극을 관람한다. 주간에는 개방되지 않거나 접근이 제한된 고종의 서재 집옥재나 건청궁의 내부를 탐방하기도 하고, 취향교를 건너 대금 선율이 흐르는 향원정의 정취를 만끽하기도 한다. 전통의 공간에서 하는 미각, 청각, 시각 경험을 극대화한 이 프로그램에 매년 외국인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K콘텐츠의 세계적인 인기로 콘텐츠 투어리즘을 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고 있는 요즘, 시각적 경이를 넘어
문화적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경험이 되고 있다.
- 거대한 미디어아트 캔버스로 바뀌는 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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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에서 한국의 전통을 경험했다면,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자연 수변 공간은 첨단 기술과 만나 거대한 야간 스펙터클을 창출하는 한국의 현대를 경험하게 한다. 주간에는그저 넓은 강변이나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었던 공간이 야간이 되면 거대한 미디어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한강 불빛 공연(드론 라이트쇼)’과 ‘서울라이트 DDP’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강 드론 라이트쇼’는 한강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1천 대에서 최대 2천 대에 이르는 대규모 군집 비행 드론이 예술을 그려내는 융복합 콘텐츠다. 2025년 한 해 동안 앙코르를 포함해 총 10회 개최되어 약 25만 명이 관람한 이 쇼가 특별한 이유는 K콘텐츠 IP와의 콜라보에 있다. 넷플릭스, 라인프렌즈, 카카오, 월트디즈니 코리아 등 글로벌 기업들과 협업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나 <스타워즈>와 같은 콘텐츠들을 하늘에 수놓았다. K콘텐츠의 세계적인 인기로 콘텐츠 투어리즘을 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고 있는 요즘, 시각적 경이를 넘어 문화적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경험이 되고 있다. 드론 쇼는 불꽃놀이와 달리 소음과 대기 공해가 없는 친환경적 첨단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도심형 관광 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서울라이트 DDP’는 건축과 미디어아트가 결합된 야간 경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형 건축물 외벽을 3차원 매핑 디스플레이로 활용한 이 행사는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독일의 iF와 레드닷, 미국의 IDEA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를 석권하기도 했다. 2024년 138만 명이던 방문객은 2025년 행사 기간 동안 약 40% 증가한 192만 명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특히 12월 31일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행사 당일에만 8만 7천 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DDP 인근 상권의 야간 유동 인구는 평시 대비 무려 559.2%가 폭증해 실질적인 경제적 파급효과도 증명했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상설 조명 전시 ‘드림 인 라이트’를 매일 운영함으로써, DDP를 사계절 내내 빛나는 야간 명소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빛을 활용한 야간 관광은 상대적으로 빛이 적은 지방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원주시의 ‘나오라쇼’는 간현관광지의 폭 250m, 높이 70m 규모의 자연 암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해 국내 최대 수준의 미디어파사드와 음악분수의 융합을 선보이고 있다.
- 퇴근길의 일상 식문화, 야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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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민들의 퇴근길 일상 식문화 역시 한국의 밤을 물들이는 매력적인 요소의 하나로 자리했다. 이른바 ‘야장(夜場)문화’가 그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종로3가 갈매기살 골목이나 을지로 노가리 골목으로 대표되는 야장문화는 실내 음식점이 도로변이나 골목으로 간이 테이블을 내놓고 영업하는 형태를 말한다. 낮에는 평범한 길이나 골목이었던 곳이 밤이 되면 퇴근 후 모여 고기를 굽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장관을 연출한다. 세련된 인테리어나 고급스러운 서비스가 아닌 낡고 허름한 간판과 빨간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고기를 굽는 매캐한 연기와 북적이는 군중의 소음은 야장문화의 백미다.
야장문화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꼭 한국에서 경험해야 하는 ‘성지체험’이 된 건, K콘텐츠를 통해 봤던 한국의 퇴근길 일상 속으로 직접 들어가고픈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왔던 퇴근길을 경험하고 싶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로3가 갈매기살 골목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격의 없이 소주잔을 부딪치고 고기를 상추쌈에 싸 먹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발 떨어져 바라보던 관광이 아니라, 보다 한 발 안으로 들어와 날것의 한국을 경험하며 감정적 유대감과 해방감을 느끼는 문화체험이 한국의 밤의 매력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야장문화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 없이도 방문객들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지역 골목상권 소비를 활성화하는 강력한 경제적 파급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서울시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야장문화를 제도권 내로 편입해 안전과 위생까지 담보하는 ‘서울 달빛야장’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야간의 골목길이 그저 지나가는 통행로가 아닌 체류와 교류가 일어나는 문화적 공간으로 되살아나는 곳, 바로 야장이다. 물론 고궁의 밤이나 미디어아트 그리고 야장문화 같은 K-야간 콘텐츠의 전제 조건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야간 치안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밤이 되어도 홀로 거리를 걷거나 야외에서 활동하는 것이 자유로운 한국의 야간 치안 수준을 놀라워한다. 소매치기와 강도 위험으로 야간 외출이 쉽지 않은 파리, 런던, 베를린 같은 유럽의 대도시들이 겪는 심각한 야간 치안 문제와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카페 테이블에 지갑이나 스마트폰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안전하고, 심지어는 잃어버렸던 물건이 그 장소에 그대로 있는 한국의 풍경은 외국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다. 한국의 밤 풍경의 특별함은 그래서 이 안전을 밑그림으로 계속 새로운 그림들로 채워질 전망이다. 어쩌면 낮보다 더 뜨거운 밤의 시간들로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