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장으로 막 승진했던 2022년도에 뜨개를 시작했습니다. 승진한 뒤의
회사 생활은 자신에게 실망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모르는 것도 많고, 나는 왜 이렇게 바보인가 싶은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그렇게 초임 차장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어릴 적 가끔 목도리를 떴던 것이 생각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실과 바늘을 샀는데, 어느덧 뜨개는 제 일상을 사로잡은 취미가 되었습니다.

내 일상을 위로하는 뜨개
뜨개는 제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일단 제 마음에 쏙 드는 도안과 도안에 어울리는 색깔의 실, 실에 어울리는 바늘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도안을 따라가다 보면 실 한 줄이 어느새 옷이 되거나, 가방이 되거나, 모자가 됩니다. 뜨개의 가장 좋은 점은 틀린 부분이 있으면 거기까지 풀어내서 고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인생에서는 실수한 곳으로 돌아가서 고치기 정말 어렵지만 뜨개에서는 가능합니다. 심지어 고치는 것이 귀찮으면 흐린 눈으로 못 본 척해도 됩니다. 머리를 비우고 손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무언가 완성되고, 내가 이런 예쁜 것을 만들었다는 자기효능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피그말리온이 왜 자기가 만든 작품과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자존감이 낮아져 있던 저에게 이보다 더 좋은 취미는 없었습니다. 옷을 한두 벌 뜨다가 실력이 점점 늘면서 마침내 사내 뜨개 동호회를 만드는 데 이르렀습니다.

좋은 것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 저는 내향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입니다.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요. 그런데 뜨개에 대해서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무얼 뜨는지 너무 궁금하고, 이 좋은 것을 왜 안 하는지 다들 한번 해보라고 영업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관심을 가질까, 본사 차장이 일은 안 하고 논다고 욕을 먹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많았지만 아주 큰 마음을 먹고 ‘매드니터스(뜨치광이)’라는 본사 뜨개 동호회를 개설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 이런 느낌을 강조하고자 여러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홍보 포스터를 붙였는데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아서 한동안 무척 쑥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동호회원이 꽤 모였고 취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저만큼 내향적인 사람들이 주로 모인 집단이라 활발히 활동하진 않지만 아주 가끔 모여서 귀여운 도안을 함께 뜨기도 하고, 누군가 멋진 편물을 완성하면 다 같이 예뻐하고 칭찬하는 사랑스러운 동호회입니다.

실과 바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뜨개는 앉을 자리만 있다면(심지어 서 있어도) 할 수 있는, 휴대가 몹시 용이한 취미입니다. 뜨개를 시작한 이후로 서울-나주 왕복 기차를 탈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요. 4시간의 뜨개 시간이 생기니까요. 10시간의 비행? 오히려 좋습니다. 약속 시각에 늦는 상대를 기다리는 시간도 싫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버리는 시간, 휴대폰만 보는 등의 붕 뜨는 시간으로 생각했던 삶의 빈틈을 뜨개로 채워 나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뜰 거리를 꼭 가지고 다니다 보니 ‘이 옷은 캐나다로 여름휴가 가서 만들었지’ 하는 추억도 생깁니다. 이렇듯 뜨개로 만든 완성품마다 서사가 있어요.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을 만들어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지만요.

누구나, 무엇이든 뜰 수 있다! 제가 뜨개인으로 소문나면서 저에게 뜨개 문의를 하시는 분이 많은데, 가장 많이 하시는 질문이 “손재주가 없는데 저도 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정말입니다. 뜨개의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 있고, 바늘에 찔려도 죽지 않으며, 뜨다가 틀리면 풀고 다시 하면 됩니다. 물론 틀리면서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뜨개는 똑같은 기술의 반복이고 무엇이든 반복해서 하다 보면 실력이 늘게 됩니다. 해보고 싶다면 일단 시작해 보세요. 유튜브에 수많은 뜨개 선생님들이 계시고 요즘은 다이소에도 뜨개 코너가 꽤 크게 있어 저렴한 실과 바늘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해보다가 정 안 되면 저를 찾아 오셔도 되고요! 이번 겨울, 보드랍고 폭닥한 뜨개의 세계에 같이 빠져봅시다!

홍혜빈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