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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춤의 순간들
나주에서 영암을 거쳐 영광까지

‘첫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흐려진다. 그 자리에는 일상이 자리 잡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익숙함만을 찾는다. 나주에서의 10년이 우리에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익숙함에 취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겨, 어쩌면 놓쳤을지도 모르는 찬란한 순간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자.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코 놓쳤던 그 순간들이 다시 선명하게 다가올 수 있다.

흐르는 강, 이어지는 삶 나주 느러지전망대

발걸음이 바쁜 도시에서는 모든 순간이 흘러가는 배경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잠시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자연의 고요 속에서 찰나를 만끽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느러지전망대로 향했다.
나무들 사이로 하얀 지붕이 눈에 띄면서 영산강이 나지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망대에 가까워질수록 높이가 실감 났다. 4층까지 이어지는 긴 계단은 오르기 쉽지 않았지만, 고생 끝에 펼쳐진 풍경은 모든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시야에 마음이 시원하게 열렸다. 초겨울의 바람마저 더할 나위 없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영산강은 한반도 지형을 닮은 나주평야를 품고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간혹 날갯짓하는 겨울 철새들이 하늘을 갈랐다. 멀리서 보면 흐름이 보이지 않지만,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빠를 때도 있고, 느릴 때도 있으며,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잠잠하게 흐른다. 강물처럼 우리 삶에도 그런 굴곡이 있다. 빠르게 지나가고 싶은 날도 있고, 거칠게 흘러 마음이 무겁고 힘든 날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나주 시민들의 든든한 전력 지킴이, 나주지사 사우들

경이로운 존재감에서 자연의 숨결을 영암 월출산 국립공원

영암은 월출산 국립공원이 유명하다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시내의 낮은 건물 뒤로 제 몸집을 묵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월출산을 보자마자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깨달았다. 영암 시내 어디를 가든 월출산이 보였다. 그 위압감은 경이로웠다. 저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제아무리 휘황찬란한 초고층 빌딩이라 하더라도 맥을 추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월출산은 달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 달밤에 바라보는 산의 형태가 아름다워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사자봉, 구정봉이 펼쳐져 있다. 코스는 다양했지만 천황사를 시작점으로 선택했다.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깊고 짙은 숲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산길은 초입부터 강렬했는데, 완만한 오르막이라 하더라도 바위가 곳곳에 자리해 무심코 내디딘 발을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길게 뻗은 나무들이 가끔씩 사이를 벌리면 월출산의 거친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산은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월(月)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바위는 차가운 회색빛을 띠며 수직으로 솟아 있었고, 그 틈으로 비집고 자란 잡초들이 생명력을 증명하듯 흔들렸다. 월출산은 단지 ‘국립공원’으로 끝나는 산이 아니었다. 그 위엄과 생동감은 마치 거대한 자연의 숨결과 같았다. 영암은 그저 월출산이 있는 곳이 아니라, 월출산이 영암을 존재하게 했다.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는 영암지사와 사우들

천천히 호흡하면 스며드는 쉼 영광 백수해안도로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시간. 영광 백수해안도로는 또 다른 세계로의 초대였다. 바다 위로 길고 선명한 빛의 물결이 펼쳐졌고, 갯벌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은 경계선이 뚜렷해 두 세계가 조우하는 듯했다. 해는 곧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아슬아슬 하늘에 걸려 있었다.
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말없이 모든 감각을 잠식했다. 나지막한 파도 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갈매기들이 유유히 날며 자연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차가 서행할 때마다 보이던 작은 어촌 마을들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의 풍경 같았다.
백수해안도로의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에만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바쁘게 달려온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만의 속도로 호흡할 수 있었다. 창밖의 바다를 보며 지나온 삶의 굴곡과 앞으로의 길을 천천히 되새길 수 있는,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쉼이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영광지사 사우들
강초희 사진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