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 MISSION
재생에너지 시대의
계통 안정화 솔루션
슈퍼커패시터(Supercapacitor)기술 혁신과 글로벌 실증 연구
글 윤여흥 전력연구원 융복합연구소 선임연구원
- 전력 계통의 패러다임 변화와
계통 유연성 확보의 필요성 -
글로벌 전력 산업은 탈탄소(Decarbonization), 디지털화(Digitalization), 분산화(Decentralization)라는 이른바 ‘3D 혁신’을 통해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비중을 29.2%까지 설정했으며 현재 수립 중인 제12차 계획에서는 더 공격적인 재생에너지 비율 상승이 예상된다.
그러나 태양광, 풍력과 같은 변동성 재생에너지(VRE)의 급격한 증가는 전력망 운영자에게 ‘계통 관성 저하’와 ‘주파수 불안정’ 이라는 기술적 난제를 안겨주고 있다.
인버터 기반의 재생에너지는 기존 동기식 발전기와 달리 사고 발생 시 주파수 변동에 저항할 물리적 관성이 부족하다.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발생할 때 주파수 하락 속도(RoCoF, Rate of Change of Frequency)가 매우 가파르게 나타나며, 이는 곧 대규모 정전의 위험으로 직결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전력망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필요한 핵심 자원이 바로 밀리초(ms) 단위의 초고속 응답이 가능한 초속응성 주파수 조정(FFR, Fast Frequency Response) 기술이다. 전력연구원은 이 분야의 게임 체인저로서 ‘슈퍼커패시터’ 기술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슈퍼커패시터의 메커니즘과
전력망 활용의 당위성 -
슈퍼커패시터는 기존의 이차전지(리튬이온배터리)와는 차별화된 에너지 저장 메커니즘을 가진다. 리튬이온배터리가 전극과 전해질 사이의 화학적 산화·환원 반응(Electrochemical Redox Reaction)을 통해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과 달리, 슈퍼커패시터는 전극 표면에 이온이 물리적으로 흡·탈착되는 전기이중층(EDLC, Electric Double Layer Capacitance) 원리를 이용한다.
이러한 물리적 저장 방식은 두 가지 결정적인 장점을 제공한다. 첫째, 압도적인 출력 밀도(Power Density)다. 화학 반응 단계를 거치지 않기에 리튬이온배터리 대비 수십 배 빠른 충·방전이 가능하며, 이는 계통 사고 시 즉각적인 전력 주입이 필요한 FFR 자원으로서 최적의 특성이다. 둘째, 반영구적인 수명과 안정성이다. 물리적 반응이기에 전극 구조의 열화가 적어 50만 회 이상의 사이클 수명을 보장하며, 화재 위험성이 극히 낮고 온실가스 배출량 또한 리튬이온배터리 대비 40~90배 저감할 수 있는 친환경적 기술이다.
전력연구원은 슈퍼커패시터의 이러한 고출력 특성과 리튬이온배터리의 고에너지 특성을 결합한 ‘Hybrid ESS’ 모델을 제시했다. 계통의 과도 상태(Transient State)에서 발생하는 급격한 주파수 변동은 슈퍼커패시터가 즉각적으로 방어하고, 정상 상태(Steady State)의 완만한 변동은 배터리가 담당하게 함으로써 계통 안정도 향상과 배터리 수명 연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다.
- MW급 슈퍼커패시터 시스템 실증과
단위셀 고전압화 기술 혁신 -
전력연구원은 슈퍼커패시터의 상용화와 경제성 확보를 위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다. 이것의 첫 번째 발걸음으로 2020년도에 주파수 조정용 그래핀 슈퍼커패시터 모듈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창전력시험센터에 1MW급 대용량 슈퍼커패시터 주파수 조정 협조 운전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상업화 수준의 경제성을 갖는 MW급 시스템을 구성하고, 전력변환장치(PCS) 및 전력관리시스템(PMS)과의 유기적인 연동을 통해 실제 계통 주파수 추종 능력을 검증했다. 이는 국내 기술로 대규모 전력망 안정화 자원을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슈퍼커패시터의 가장 큰 약점은 낮은 단위 셀 전압(2.7~3.0V)이었다. 에너지 저장 용량이 전압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압 상향은 시스템 성능 향상의 핵심이다. 전력연구원은 고전압용 신규 부품소재(전극 및 전해액)와 구조 설계를 통해 단위 셀 당 최대 전압을 5V까지 끌어올리는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이 기술의 핵심 가치는 ‘직렬 연결 셀 수의 저감’을 통한 경제성과 고효율 ESS를 확보함에 있다. 고전압 시스템 구성 시 필요한 셀 개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내부 저항을 감소시키고, 시스템 부피와 제조 원가를 절감하며 기술적 복잡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슈퍼커패시터 기반 ESS의 에너지 밀도를 비약적으로 높여, 리튬이온배터리 없이 계통안정화용 ESS에 단독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술적·경제적 파급효과와
계통 기여도 - 슈퍼커패시터 기반 계통 안정화 솔루션의 도입은 전력계통 운영 전반에 걸쳐 막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기술적 측면에서 슈퍼커패시터는 계통의 사고 파급을 차단하는 데에 활용성이 높은 자원이다. 신재생에너지 단지 및 계통 취약 지점에 설치되어 전압 및 주파수 안정도를 지원함으로써 재생에너지 수용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특히 고전압 5V 기술은 설비의 소형화와 모듈리스(Module-Less) 설계를 가능케 하여 부지 확보가 어려운 도심형 변전소 ESS 구축에 최적화된 해답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측면에서 가치는 더욱 명확하다. Hybrid ESS 운영 시 슈퍼커패시터가 배터리의 가혹한 동작을 분담함으로써 리튬이온배터리 ESS의 교체 주기를 늦추고 운영비용(OPEX)을 절감한다. 또한 5V 기술을 통한 설비 투자비(CAPEX) 절감은 ESS 자원의 시장 경쟁력을 높이며, 이는 한전의 재무 구조 개선은 물론, 에너지신산업 분야의 글로벌 기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글로벌 실증 사례와
국내 정책의 한계 - 현재 전력연구원은 앞서 소개된 국내 성과를 바탕으로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아일랜드 전력 계통 실증사업이 있다. 아일랜드는 높은 풍력 발전 비중으로 인해 계통 주파수가 매우 불안정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DS3(Delivering a Secure Sustainable Electricity System)’라는 혁신적인 보조서비스 시장을 운영 중이다. 아일랜드 계통 운영자(EirGrid)는 주파수 하락 시 2초 이내에 반응하는 FFR 자원에 대해 매우 높은 보상 단가를 적용한다. 전력연구원은 현지 기업인 Lumcloon Energy社와 협력하여 슈퍼커패시터의 QTP(Qualification Trial Process)* 인증과 실계통 연계 운전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전력의 기술이 글로벌 표준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QTP(Qualification Trial Process): 신기술이 실제 계통에 사용되기 전에, 장기 실증을 통해 성능 및 계통운영의 호환성을 검증하는 필수 인증 절차
- 정책 개선 및
규제 혁신 제언 -
현재 국내 주파수 조정 시장은 주로 리튬이온배터리 중심의 장주기(에너지 중심) 자원 보상 체계에 묶여 있다. 밀리초(ms) 단위로 반응하며 계통 붕괴를 막는 슈퍼커패시터의 ‘속도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고속 응답 전용 보조 서비스가 부재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당면하게 될 재생에너지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슈퍼커패시터 기술이 핵심 인프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① 초속응성 주파수 응답(FFR)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신재생비중이 50%가 넘는 아일랜드는 DS3 서비스와 같은 보조 서비스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고, 특히 응답 속도에 따른 차등 보상체계가 아일랜드 계통 안정화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우리도 늘어나는 신재생에너지 정책에 따라 신규 도입될 수 있는 보조 서비스 시장 환경을 고려하여 고출력 자원이 계통 안정화에 정당한 보상을 받으면서 기여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기술적, 정책적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② 단일 ESS의 한계를 보완하고 경제성·안정성·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Storage mix 전략이 필요하다. 출력과 에너지 중심의 용도별 최적의 조합을 구성하고 운전 범위가 다른 자원에 대한 운영 기준 수립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특히, 출력 중심의 슈퍼커패시터와 에너지 중심의 배터리가 결합한 복합 자원은 대표적인 Storage mix의 사례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단일 자원보다 높은 경제성과 계통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다.
③ 안전성 기반 ESS 기술이 확산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화재 위험성이 현저히 낮은 슈퍼커패시터의 특성은 기존 리튬이온배터리에 적용되던 과도한 소방 및 설치 규제를 최소화할 수 있고, 온도 유지를 위한 공조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신기술이 계통에 적용되기 위한 진입장벽은 높지만 이를 극복하고 확보한 운영 기술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신사업이 될 수 있다. 특히 신재생 비중이 높은 국가에서는 속응성 자원에 대한 필요성과 경제성이 높으므로 기술 확산의 가속화 가능성이 높다.
- 세계 전력망의 표준을 선도하는
KEPCO - 한전의 슈퍼커패시터 기술개발 여정은 단순한 장치 개발을 넘어, 전력망의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1MW급 시스템 실증 성공부터 5V 고전압 원천 기술 확보, 그리고 아일랜드 해외사업 진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에너지 전환 시대의 핵심기술을 선점하고 있다. 이제는 확보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제도의 혁신을 이끌어내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술 우위를 공고히 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전력이 개발한 초고속 응답 기술은 다가올 탄소중립 시대, 전 세계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표준 기술(Global Standard)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1초의 찰나에 계통을 지켜내는 기술의 힘, 그것이 바로 한국전력이 그리는 미래 에너지 세상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