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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존재들로부터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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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력(無害力)은 해롭지 않은 것들의 힘을 뜻한다. 자극적인 뉴스와 거친 댓글, 경쟁과 과시가 넘치는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친다. 그럴수록 작은 것, 귀여운 것, 순수한 것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책상 위에 올려둔 미니어처 피규어, 스마트폰 케이스에 붙인 동글동글한 스티커, 심지어 돌을 반려로 들이는 ‘반려돌’까지 인기다. 단순한 돌멩이에 이름을 붙이고, 집을 만들어 주고 액세서리로 꾸며주기도 한다. 때로는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햇볕을 쬐게 하기도 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과 ‘쉼’을 느낀다.
이런 작은 존재들에 대한 선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상은 더 불확실해졌고, AI와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삶을 바꾸고 있다. SNS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새로운 정보가 쏟아진다.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롭지 않은 것, 나를 위협하지 않는 것에 손을 뻗는다. 그래서 무해력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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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롭지 않음’이 이끄는 소비 트렌드
- 이처럼 ‘무해력’은 단순히 작고 귀엽고 순수한 사물이나 존재를 선호하는 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제로칼로리 음료 시장은 3년 연속 두 배 성장률을 기록했고, 모든 카페에는 디카페인 커피 메뉴가 생겼다. ‘맛은 그대로지만 몸에는 해롭지 않다’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무알콜이나 저알콜 음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술 섭취를 최소화하거나 줄이는 ‘소버 라이프(Sober Life)’ 생활방식의 성장은 음주로 인한 건강 부담, 사회적 스트레스, 다음 날 숙취 등의 부담을 피하면서도 음료를 즐기고 싶은 심리가 반영된 결과다. 콘텐츠도 마찬가지이다. ASMR 쇼츠가 하루 조회 수 500만 회를 돌파하고, 아기 판다의 성장 영상은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한다. 연예계에서는 논란 없는 ‘무해한 이미지’가 스타의 생명력이 되고, 브랜드 세계에서는 사회적 이슈에서 자유로운 ‘착한 브랜드’가 각광받는다. 모두 ‘해치지 않음’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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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와 내면의 변화
- ‘무해력’이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인간관계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비판과 논쟁 대신 사소한 칭찬과 응원, 긍정의 피드백을 남기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완벽주의와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서툴러도 괜찮은, 인간적인 모습이 오히려 더 큰 호감과 신뢰를 얻는다. 남에게는 더 관대해지고, 스스로에게는 더 너그러워진다. 무해력은 약하거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성이 담긴 배려이자, 적극적인 긍정의 힘이다. 사람들은 ‘착한 척’에는 오히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진짜 무해력은 해롭지 않으면서도, 나와 다른 사람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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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에 스며든 무해력의 역할
- 이런 무해력의 힘은 조직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누군가를 억지로 이기려 들지 않고, 강한 카리스마 대신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문화는 구성원 간 더 큰 신뢰를 자라나게 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갈등과 스트레스가 줄고, 오히려 창의성과 효율성이 높아진다. 강하게 이끌지 않는다고 해서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제와 복종을 강조하고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권위주의가 아닌, 팀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팀원들에게 비전과 자율성을 부여해 유연성 높은 조직으로 이끄는 정당한 권위는 팀원들의 참여를 높이고 혁신과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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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감보다 무해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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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아이러니하다. 본질적으로 영향력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무해함이 힘이 된다. 무해력에 끌리는 것은 무의식적이고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해함’이라는 특성으로 메시지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할 때, 단순히 밋밋하거나 매력 없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소 모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안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된다.
요즘의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기엔 현실이 너무 혹독하다.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어 이념, 계층, 세대, 성별 등의 구별은 점점 더 우리 사이를 가르고, 마음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날들 속에서 무해함은 심리적 안전지대를 만들어 주고 있다. 작은 것들이 쌓여 만들어 내는 신뢰와 안정감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진짜 힘이 된다. 해치지 않음의 미학, 그 안에 담긴 따뜻함과 배려, 그리고 소소한 행복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진정성이다.
Do-No-Harm의 시대,
무해력이 만드는새로운 신뢰
귀엽고 친근한 아이템인 키링, 마그넷 등이 요즘 인기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미미한 생명체나 사물을 재해석해 만든 피규어, 유머러스한 표정의 인형 등이 SNS에서 ‘힐링템’으로 불리며, 일상에 소소한 웃음과 위안을 준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강렬하고 압도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우리는 이제 작고 귀엽고 순수한 것들 앞에서 마음을 열고, 기꺼이 지갑도 연다. ‘무해력’이 대세가 된 세상이다.
Text 이혜원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