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힙하다는 클래식

힙(Hip)이라는 단어는 원래 ‘최신의’, ‘유행에 민감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신 트렌드를 아는 사람, 혹은 세상 물정에 밝은 이를 지칭할 때 쓰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즘 젊은 세대가 ‘힙하다’라고 부르는 것들을 보면 남과는 다른 개성, 신선함, 그리고 자기만의 감각을 찾는 태도와 연관된 일들이 많다. ‘힙’이라는 것이 더 넓고 깊게 확장된 셈이다. 누구나 따라 하는 메인스트림이 아니라 잊혀졌던 것,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일들도 모두 ‘힙’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임윤찬, 조성진 같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클래식의 권위와 난해함을 넘어, 감각적이고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도구로 읽힌다. 그들의 무대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공간이 아니라, 느림과 집중을 통해 내면을 채우는 경험의 장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2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꺼두고 오직 음악에만 집중해야 하는 곳. 박수조차 정해진 때에만 칠 수 있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는 곳. 언뜻 답답해 보이는 이런 제약들이 오히려 몰입과 여유를 선사한다.
클래식이 힙해졌다는 건, 이제 클래식이 소수의 교양이나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에서 바흐와 쇼팽이 흘러나온다. 임윤찬의 연주 영상이 SNS를 타고 퍼지고,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소식은 아이돌의 글로벌 시상식 수상처럼 화제가 된다.
최근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30세 이하의 젊은 스타들이 세계 곳곳에서 주목받고 있다. 루이스 필립슨(Louis Philippson)은 유튜브와 SNS에서 75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은 독일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브이로그와 피아노 연주 영상을 통해 클래식이 어렵지 않고,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임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그의 첫 솔로 투어는 독일 주요 도시에서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아날로그 감성, 텍스트힙의 부상

이런 현상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출판계에서는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한때는 지루하고 진지한 취미로 여겨졌던 독서가, 이제는 텍스트의 고유한 매력이 재발견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텍스트힙 열풍과 함께 활성화된 ‘독서클럽’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SNS에 독서 인증사진을 올리고, 좋은 문장을 필사해 공유하는 등 독서를 통해 자신의 감성과 개성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독서클럽은 책을 매개로 한 깊은 커뮤니케이션과 경험 공유의 장이 된다. 실제로 트레바리, 민음사 북클럽 등 유명 독서 모임은 ‘유료 회원제’와 ‘독후감 작성’ 등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점에서 신뢰와 공감을 얻고 있다. 이 모임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새로운 시각을 배우며, 공동체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힙독클럽’과 같은 공공 독서모임도 텍스트힙 트렌드에 발맞춰 등장했다. 이들은 독서 진도와 필사 활동을 기록하고, 이를 온라인에서 공유하며 등급과 마일리지를 부여받는 등 독서를 게임화하고, 사회적 인정과 보상을 통해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독서문화를 통해 공공서비스를 힙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연예인들의 공항 패션 역시 결이 달라졌다. 한때는 화려한 의상과 고가의 액세서리로 무장했던 연예인들이 이제는 책을 필수 소품으로 들고 다닌다. 아이돌 멤버가 들고 있던 철학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배우가 읽었다는 시집이 품절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책이 명품 가방만큼이나 강력한 패션 아이템이 된 것이다. 책을 든 모습이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만든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서점 브이로그를 찍고, 예쁜 북커버와 독서링을 자랑하는 것이 새로운 플렉스가 되었다.
유명인들의 텍스트힙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배우 박정민은 아예 출판사를 설립해 화제를 모았다. “좋은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라는 그의 말처럼, 연기자가 직접 책을 만들고 유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종이책 특유의 질감과 책장 넘기는 소리, 새 책의 냄새까지도 하나의 감각적 경험으로 소비되는 시대. 디지털 텍스트로는 느낄 수 없는 물성에 대한 갈망이 텍스트힙이라는 새로운 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디지털에 둘러싸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진짜’를 갈망한다는 신호가 있다. 임윤찬의 연주를 듣던 한 관객이 “에너지가 필요할 때, 힘을 북돋워 주는 기운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결국 클래식이나 텍스트가 ‘힙’과 합쳐진 이유도, 우리가 진짜 경험, 진짜 감동, 진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감각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연결되지 않을 자유, 옛날 전자제품

최근 인터넷 연결이 없어도 목적에 충실한 전자제품들이 다시 주목받는 현상 역시 클래식힙, 텍스트힙의 맥락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느림과 몰입을 경험하듯,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기듯, 외부와 연결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순수한 경험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고 셔터를 누르면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딸깍’ 소리가 들린다. 필름이 몇 장 남았는지, 빛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신경 쓰며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사진을 찍지만, 그 사진을 보려면 또 시간이 필요하다. 현상소에 맡겼던 필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설렘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수백 장의 파일로는 느낄 수 없는 고유한 감동이다. 전자사전의 물리적 버튼을 두드리며 단어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MP3 플레이어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 파일을 하나하나 옮겨 담는 일은, 일종의 성취감마저 선사한다.
이 모든 순간은 디지털 세대에게 ‘기다림’과 ‘집중’이라는 낯선 경험을 선물한다. 스마트폰의 무한 스크롤과 끊임없는 알림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젊은 세대는 이 과정에서 일상의 진정성을 찾고, 스스로의 감각과 취향을 돌아본다. 인터넷이 없는 기기에서 느끼는 자유, 그리고 목적에 충실한 사용의 즐거움은,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진짜 경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한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에, 불편함을 감수하며 옛 기기를 찾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나 과거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손끝에서 느껴지는 물리적 만족감과 결과를 기다리는 설렘을 향유하는 셈이다.

내 손으로 제작하는 힙한 세계

‘라이트 매뉴얼 워크’가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 즉 뜨개질, 도배, 목공, 가죽공예 같은 활동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라이프스타일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현상을 가리킨다. 손가락으로 실을 감고, 나무를 깎고, 가죽을 바느질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소리, 그리고 결과물이 눈에 보인다는 효능감은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매력이다. 손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과 의미를 찾는다.
앞서 힙의 본질이란 시대를 능동적으로 즐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태도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를 감안해 보면 온라인에서 모여 1박 2일 동안 뜨개질만 하는 캠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뜨개질을 하는 상영회, 혹은 직접 만든 목공 소품이나 가죽 지갑을 SNS에 공유하는 일은 모두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드러내는 자기표현 중에서도 가장 앞서가는 방식이다.
다양한 ‘힙’ 현상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클래식힙, 텍스트힙,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일까지, 이 모든 것은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택한 일종의 균형추다. AI가 인간의 창의성마저 모방하고,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려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간절히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직접 들을 수 있고,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한다. 그것은 3차원 존재인 우리가 본능적으로 발산하는 진정성에 대한 신호다.
앞으로도 ‘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유행을 쫓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을 찾아가는 능동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빠름과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임윤찬의 피아노 선율이 수만 명의 가슴을 울리고, 종이책의 촉감이 위로가 되며, 손으로 만든 작품이 자부심이 되는 이유. 그것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인간다움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다. 클래식힙은 그렇게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화 코드로, 삶의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앞으로도 ‘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유행을 쫓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을 찾아가는 능동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빠름과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클래식이 즐거워지는 추천 도서

    • <두근두근 클래식>
    • 저자 허제
    • 출판사 좋은땅
      클래식 음악과 명연주가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음악 수필집이다.
    • <미술관에 간 할미>
    • 저자 할미
    • 출판사 더퀘스트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미술사 지식을 그림사랑꾼 할머니의 따뜻하고 웅숭깊은 시선으로 풀어낸 미술 교양서다.
    • <하루 하나 클래식 365>
    • 저자 안일구, 김소라, 박지혁, 황장원, 유정우, 조민석, 데얀 가브리츠
    • 출판사 문예춘추사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새로운 주제의 클래식 음악을 소개한다. 불후의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일 한 곡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
    • <도슨트처럼 미술관 걷기>
    • 저자 노아 차니
    • 출판사 현대지성
      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복잡한 미술 이론 지식 없이도 작품을 쉽게 보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미술 교양 입문서다.
    • <아무튼 클래식>
    • 저자 김호경
    • 출판사 코난북스
      매력적이면서도 철옹성같이 완고하기도 한 클래식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풀어낸 음악 에세이다.
    • <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저자 양정무
    • 출판사 사회평론
      누구나 명작이라 칭송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며 세월의 풍파를 거치며 명작이 되어가는 아름다움을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클래식을 잘 알려주는 유튜브 채널

  • 클래식 좀 들어라
    @ClassicZomListen

    클래식을 다루는 채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썸네일과 클래식 소개로 클래식에 대한 편견을 깬다.

  • 아트레킹 - 이창용 도슨트의 예술 산책
    @ARTRACKING

    이창용 도슨트가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설명해 주는 채널이다.

PDF 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