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이에서 깊이로의 전환

    처음 인터넷이 열렸을 때만 해도 지식은 깊이가 아닌 넓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한 분야의 지식을 깊이 파고들던 책에서, 여러 링크로 넘나들며 무한정 지식의 범주를 넓혀가는 인터넷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그래서 수십 권으로도 채워 넣기 어려운 철학사를 단 한 권으로 정리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책이 주목되었다. 깊이는 없지만 폭넓게 전체 지식을 개괄하는 시야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예능이 인문학을 소재로 끌어들여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류의 프로그램들을 쏟아 낸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나를 깊이 파고들기 보다는 여러 전문영역으로 무한 확장하는 지식의 넓이가 추구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이제 다시 깊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뭐든 물어보면 척척 답해주는 ‘박학다식’은 이제 검색어 하나만 치면(요즘은 그냥 AI에 묻기만 해도 된다) 줄줄이 답을 내놓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그다지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게 됐다. 대신 한 분야를 깊게 파고 들어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독보적인 지식이 진짜 가치를 갖게 됐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빠져드는 덕질과 그래서 하게 되는 디깅(Digging)이라는 트렌드가 등장한 건 이런 변화 때문이다.
    디깅은 사전적으로는 ‘땅을 판다’는 채굴을 뜻하지만, 라이프 스타일을 지칭하면서 일상 속의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탐구적 행위를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디깅이라는 용어가 주로 등장한 건 음악 분야에서다. ‘레코드 디깅’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면서 희귀한 음반을 찾아내거나, 곡의 샘플 소스를 추적해가는 행위를 의미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자료 수집과 분석 행위 전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이는 디지털 환경과 인터넷 검색, 커뮤니티 활동 등이 디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덕질과 디깅의 만남

    어떤 분야를 파고든다는 건 그 분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전제한다. 좋아해야 그만큼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질과 디깅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과거의 덕질이라고 하면 그 분야 자체가 스타에 국한되었고 그 행위도 스타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열광하는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개성이 되는 취향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덕질은 스타만이 아닌 콘텐츠나 특정 분야로까지 그 대상이 확장되었다. 나아가 그 행위 또한 수동적인 애정 표현을 넘어 보다 능동적이고 분석적이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진화했다. 예를 들어 BTS의 팬덤 아미들은 단순히 음악을 소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가사나 뮤직비디오 이면에 담긴 메시지나 서사를 탐구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그 제작 과정에도 관심을 쏟는다. 팬들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SNS는 이 정보들을 서로 공유하고 토론하며 심지어 창작까지 가능하게 해준다. 이른바 ‘밀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밀리터리 분야의 덕후들은 KBS2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같은 사극에 등장하는 투석기가 과연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친 것인가를 파고들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그래서 사극 제작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변화한 덕질 문화 속에서 디깅은 덕후들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 대상에 빠져들고,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은 욕망에서 디깅이 시작되며 그것은 덕질의 대상을 더욱 좋아지게 만드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K팝 팬덤이 아티스트의 현재 활동하는 노래만이 아니라 데뷔 전의 모습이나 연습생 시절 인터뷰 나아가 과거 커뮤니티 게시글까지 파고드는 건 이제 그 애정을 표현하고 팬덤 내에서의 소속감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당연한 디깅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디깅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팬아트나 세계관 정리, 뮤직비디오 분석, 영상 편집 같은 2차 창작으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콘텐츠의 재구성은 문화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나가는 과정으로 덕질과 디깅의 만남은 그 분야의 전문가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성장의 모멘텀이 되기도 한다.

  • 디깅 마케팅의 급부상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라고 한 맹자의 말은, 디깅 마케팅의 세계에도 어울리는 말이다. 상품의 질이 어느 정도 평준화가 되면 소비를 이끄는 건 좋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팬덤 소비’ 는 이제 대중문화의 범주를 넘어서 일상생활 전 분야로 확대됐다. 사람들은 이제 좋아하는 것을 소비한다. 그러니 덕질과 디깅의 대상이 되는 것만큼 마케팅에 효과적인 건 없다.
    이런 변화는 콘텐츠 소비의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한 OTT를 들여다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과거 TV 방식의 콘텐츠 소비는 특정 시간대에 채널을 선택해 콘텐츠를 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OTT는 시간대와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무한정 파고드는(디깅)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AI를 활용한 ‘개인화’ 솔루션은 구독자가 좋아하는 콘텐츠들을 모아주고, 하나를 소비하면 관련 콘텐츠(작가나 감독, 배우 혹은 장르 등으로 관련된)들을 계속 소개해 준다. 자연스럽게 덕질과 디깅이 이뤄지는 것이다.
    OTT로 인해 영화 관객을 잃은 극장들도 디깅 마케팅을 활용한다. 최근 개봉한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같은 재패니메이션은 80회가 훌쩍 넘는 TV시리즈를 봐야 이해되는 작품이지만 메가박스 단독 상영으로만 62만 관객 수를 넘겼다. <진격의 거인>을 덕질한 관객들이 디깅의 방식으로 영화관까지 찾았던 것이다. 최근 <진격의 거인> 같은 재패니메이션 팬들의 디깅은 OST로 이어져 국내 J팝 열풍을 만들기도 했다. 재패니메이션 OST를 부른 요아소비나 스파이에어, 오피셜히게단디즘, 레드윔프스 같은 아티스트들이 그 열풍의 주역들이다. 취향의 시대에 들어서 덕질과 디깅은 단순한 소비의 차원을 넘어선다. 덕질과 디깅이 만나 이뤄지는 선순환은 관련 사업을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적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을 탄생시킨다. 이들 중에는 관련 산업으로 편입되어 글로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나기도 한다. 덕질하던 그들이 이제 덕질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그 성장의 과정 속에 이제 덕질과 디깅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 덕질가이드

    • 예절샷 이런 맛있는 걸 먹을 때는 찍어서 함께 보여 주는 것이 예의?’ 이른바 ‘예절샷’은 덕질의 한 방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 자신이 좋아하는 최애 포카(포토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최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덕질 방식으로, SNS를 통해 일상을 나누는 문화가 더해져 생겨난 현상이다.

    • 앨범깡 새로운 물건을 주문해 포장을 벗겨내는 과정을 찍어 올리는 ‘언박싱’ 영상은 이미 일반화된 지 오래다. 이것이 덕질과 연결되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을 언박싱하며 그 두근대는 마음을 담아 SNS에 올리는 이른바 ‘앨범깡’으로도 발전했다. 최근 포토 카드나 팬 사인회 응모권을 앨범에 넣어 판매하면서 같은 앨범을 여러 장 구매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 성지순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 혹은 K팝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 촬영지 등을 찾아가 인증사진을 남기는 일은 이제 ‘성지순례’로 불린다. 단순한 촬영지만이 아니라, 최애가 자주 찾았던 식당을 순례하거나 앨범 표지를 찍은 곳을 찾고 소속사를 찾아가 굿즈를 구매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이제는 팬들이 응당 해야 하는 성지순례로 자리 잡았다.

    • 직관(N차 관람) 덕질의 꽃은 역시 최애를 눈앞에서 직접 보는 일이다. 그래서 스포츠팬들의 경우는 경기를 직관하고, 음악 팬들은 콘서트를 직관한다. 물론 재패니메이션 같은 콘텐츠의 경우는 극장상영을 하면 가장 좋은 음향이나 영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 직관하기도 한다. 팬들에게는 같은 경기나 콘서트 그리고 콘텐츠를 여러 차례 관람하는 N차 관람도 ‘국룰’로 자리 잡고 있다.

    • 굿즈 최근 팬덤은 대부분 소비 팬덤이다. 어떤 취향에 맞춰 디깅을 하다 보면 당연히 파생상품을 수집하는 단계로 들어가는데, 덕질의 수요가 이처럼 생기다 보니 다양한 굿즈들이 탄생한다. 최애의 캐릭터 상품은 물론이고 특정 브랜드 제품에 대한 덕질도 하나의 굿즈 개념으로 다양화되는 경향 또한 보이고 있다. 이른바 ‘한정판’ 굿즈는 그래서 팬덤을 움직이는 마케팅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유튜브 @차주영붐은온다

      2차 창작 최애들의 콘텐츠를 가져와 그 캐릭터를 활용한 소설(팬픽)을 쓰거나 혹은 뮤직비디오(팬메이드 뮤비)를 만드는 2차 창작도 덕질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기존 최애의 콘텐츠에서 팬들이 선별해 재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2차 창작은 애정의 차원에서 창작의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산업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2차 창작을 통해 덕질을 하던 팬이 덕질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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